[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8.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

최동열 2023. 5. 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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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고구려비(국보 제205호). 현존하는 남한 유일의 고구려 비이다. 5세기 전반 고구려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개척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44㎝, 너비 55㎝ 크기의 비석이다. 1979년 충주지역 문화재 관련 모임인 ‘예성동호회’에서 마을 돌기둥에 비문이 있음을 확인, 단국대를 중심으로 조사단이 꾸려지고, 세부 판독 조사를 통해 고구려 비 임이 확인됐다.(사진/충주시청 제공)

■서기 450년 삼척에서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 발생

-고구려 장수왕 격노, 신라 눌지왕(마립간) 사과
서기 450년, 현재의 강원도 삼척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을 격분케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412년∼491년까지 무려 79년간 왕좌에 군림하면서 고구려의 영광을 구현한 왕이다. 그렇게 힘 있는 왕의 치세에 고구려 변방의 장수(邊將)가 실직(悉直·현재의 삼척)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고구려 변장은 실직 벌판에서 사냥하던 중 군사를 거느리고 출병한 하슬라(현재의 강릉) 성주(城主) 삼직(三直)에게 살해당한다.

이 사건은 당시 동해안의 정황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건을 통해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고구려 세력이 삼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고구려 장수가 사냥을 한 것이 아니라 군사 훈련을 한 것으로 확대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삼척에서 군사를 움직일 정도라면 고구려의 영향력은 이 지역에서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삼척시 사직동 고분 내분 모습. 5세기 말∼6세기 초의 고분이다.(가톨릭관동대 박물관)

그런데, 이 사건을 보면서 지리적 위치와 관련해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삼척은 강릉보다 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고구려 변장이 삼척에 주둔하고 있었다면 더 북쪽에 있는 강릉도 당연히 북방 고구려의 세력권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런데 한참 남쪽인 삼척에서 사냥하던 고구려 장수가 북쪽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난 강릉의 성주에게 살해당하다니, 지리적 정황상 앞뒤가 맞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보고를 받은 장수왕은 격분했다. 신라 눌지왕에게 사신을 보내 “대왕과 우호관계를 맺어 매우 기뻤는데, 이제 군사를 보내 우리 변경의 장수를 죽이다니,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라고 따지며 즉시 군사를 동원해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했고, 신라 왕(눌지 마립간)이 결국 장수왕에게 간곡히 사과했다는 것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장수가 살해당하자, 고구려 장수왕이 신라에 항의하는 것도 모자라 즉시 군사행동에 나서고, 신라왕이 황급히 사과했다는 것은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을 일으킨 하슬라 성주가 당시 어떤 형태로든 신라에 소속된 장수였다는 것을 확인케 한다는 점에서 지리적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광개토-장수왕 시대 동해안, 고구려 세력의 영향 커져

 

▲ 삼척 갈야산 고분에서 출토된 신라토기, 굽다리 접시(가톨릭관동대 박물관)

사건을 이해하려면 당시 동해안의 군사적 정황과 세력 판도 변화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동해안은 북방의 고구려와 남방의 신라가 세력을 잉태하면서부터 양대 세력이 각축을 벌인 곳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史書)에 의하면 강릉지역의 경우 고구려가 한사군(漢四郡) 세력을 축출하고 판도를 넓히면서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河瑟羅)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뤄 미뤄볼 때 강릉 지역은 한사군 축출 이후 북방지역에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척·울진 등 동해안 남쪽 지역도 파사왕 23년(102년) 실직국이 신라에 항복하기는 했으나 북방에서 중국 세력을 축출하면서 힘을 키운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남하하면서 3세기 즈음에는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 놓이게 된다.

강릉·삼척·울진 등지가 다시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는 것은 4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내물왕 40년(395년) 삼국사기 기록에는 “북쪽 변경에 침입한 말갈을 실직(삼척)의 들판에서 싸워 크게 격파했다”고 하고, 42년(397년) 기록에는 “7월에 북쪽 변방 하슬라에 가뭄이 들고, 재해가 있어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죄수를 사면하고, 조세를 면제해 줬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이는 강릉 이남 지역이 4세기 말 당시에는 신라의 영향권으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고구려 변장 피살사건이 발생한 5세기에는 동해안에서 북방 고구려의 공세에 신라가 내내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전개된다.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에는 “영락(永樂) 10년(광개토대왕 9년, 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고, 왜(倭)를 격퇴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왜인들의 발호로 수도 서라벌까지 위협당하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당시 막강한 무력을 자랑하던 고구려의 구원을 받음에 따라 그즈음 동해안에서 신라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는 4세기 말과 5세기 초반에 고관의 자제와 왕자를 잇따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낼 정도였으니 속국 같은 처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획된 살해 사건-신라의 변신과 발전

 

▲ 강릉시 초당동 고분 출토 은제관식(銀製冠飾) 장식품. 고구려 장수 살해사건이 발생한 5세기 후반 유물이다.(강릉원주대박물관)

이렇게 당시 정황을 살펴보고, 고구려 변장 피살 사건을 다시 분석해 보자. 고구려 변장이 삼척에서 강릉 성주에게 피살된 사건이 발생한 서기 450년 당시는 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 황금기였다. 광개토대왕 때 신라를 도운 고구려 세력이 강력한 군사력을 토대로 그때까지 동해안에 군사 주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고구려 군사의 신라 영토 내 주둔 단서는 충주고구려비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79년 발견된 충주고구려비(국보 205호·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소재)는 장수왕 대에 세워진 비석이라는 견해가 유력한데,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 고구려가 신라를 아우(第)로 지칭하면서 예속적 우월 관계를 드러낸 것은 물론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라는 표현을 써 고구려 장수가 신라 영토 내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타국의 군사가 자국의 영역 내에 주둔하고, 내정에까지 깊숙이 간섭하는 상황은 주권 국가로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고 노력한 왕이 눌지왕이었다. 417년 왕위에 오른 눌지왕은 왜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미사흔과 복호를 구해내고, 백제와 화친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하는 등 자주권 회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왕이었다. 고구려 변장 살해 사건에 대해서도 사과하기는 했으나 이후 눌지왕은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하자 백제에 원군을 보내는 등 고구려 세력 축출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이와 관련, 삼국사기 눌지왕 기록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침략하니 왕이 군사를 보내 구해주었다’고 내용이 등장한다. 신라와 백제가 연합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나제 동맹’의 서막을 열고, 이후 신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6세기에 비약적 발전을 하는 토대를 닦은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450년에 실직에서 발생한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은 성주 개인이 미상의 감정에 의해 벌인 개인적이거나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라 중앙 정부 차원에서 치밀하게 계획한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고구려를 견제했지만, 눌지왕은 사실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눌지왕이 고구려 세력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물왕-실성왕-눌지왕으로 이어지는 당시의 왕위 계승에서 빚어진 알력 관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 동해시 구호동 고분에서 출토된 각배(角杯). 쇠뿔처럼 생긴 그릇으로 6세기 전반의 유물이다.(가톨릭관동대 박물관)

삼국사기에 따르면 392년에 신라는 후일 왕이 되는 실성(實聖)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볼모로 보낸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왕은 내물왕이었고, 내물왕의 아들 복호를 볼모로 보낸 왕은 실성왕이었다. 실성왕은 복호의 형인 눌지까지 죽여 후환을 없애고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데 대해 원한을 갚으려 한다. 눌지를 죽이려는 계획과 실천은 비교적 치밀하게 전개된다. 실성왕은 자신이 고구려에 있을 때 사귀었던 사람을 신라로 불러들이면서 “눌지로 하여금 그대를 맞게 할 테니 눌지를 보거든 죽이라”고 권한다. 그런데, 눌지를 만난 고구려 사람이 눌지의 용모와 기상에 반해 실성왕의 계략을 오히려 털어놓고 돌아가 버리니 눌지가 분개해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됐다는 기록이 삼국사기 눌지왕 편에 수록돼 있다. (삼국유사에는 실성왕이 전왕인 내물왕의 아들 눌지가 덕망이 있는 것을 꺼려 죽이고자 고구려 군사를 청했으나 고구려 군사들이 눌지가 어진 인물인 것을 알고, 오히려 실성왕을 죽인 뒤 눌지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갔다는 얘기가 나온다) 어느 쪽이든 눌지왕 즉위에 고구려 세력이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목숨까지 경각에 달린 결정적인 상황에서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눌지왕은 사사건건 내정에 간섭하는 고구려와의 우호 관계를 정리하고 오히려 백제와 화친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는 등 자주적인 힘을 키우는 데 주력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국가 관계에서 영원한 동지, 영원한 적은 없다는 것을 고구려 장수 살해사건과 그 후 신라의 처신 및 약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최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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