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LIVING LEGEND’ 우리는 김선형의 시대에 살고 있다

최창환 2023. 5. 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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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강동희, 이상민, 김승현, 김태술로 이어지는 6년 주기설부터 주희정, 신기성, 양동근까지. 한국 농구는 그동안 많은 포인트가드들이 계보를 이어왔다. 이제는 ‘플래시썬’ 김선형(35, 187cm)이 이들의 뒤를 잇고 있다. 어쩌면 훗날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전설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끔찍했던 부상, 그에 따른 슬럼프를 딛고 다시 MVP에 오른 김선형의 농구 인생을 ‘KIM SUN HYUNG’이라는 이름과 함께 돌아봤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5월호에 게재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KING IS BACK_MVP의 귀환

2번째 정규리그 MVP 트로피를 품기까지 꼬박 10년이 걸렸다. 데뷔 2년 차에 MVP로 선정되며 라이징스타의 탄생을 알렸던 김선형은 30대 중반에도 20대 가드들을 상대로 경쟁력을 과시,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또한 이상민, 서장훈, 김주성, 양동근에 이어 정규리그 MVP 2회, 파이널 MVP 1회 이상 수상 경력을 지닌 역대 5번째 국내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전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이 긴장되더라고요. MVP로 호명되는 순간 ‘아, 드디어 다시 받는구나’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첫 MVP 받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죠. 그땐 팀이 압도적인 정규리그를 치렀기 때문에 주위에서 ‘네가 받을 거야’라고 계속 얘기해줬지만, 이번에는 아니었거든요. 마음가짐도 달랐어요. 예전에는 그저 열심히, 즐겁게 뛰면 된다는 마음이었는데 연차가 쌓이면서 책임감도 생기고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아지더라고요. ‘연봉킹’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책임감보단 지난 시즌 파이널 MVP라는 것에 대한 책임감이 더 컸어요. 그만큼 저에 대한 주위의 기대치도 더 올라갔을 테니까요. 한편으로 부담감도 따랐지만 스스로 돌아봐도 제일 기억에 남는 시즌을 만들어서 기뻐요. 전설들만 달성한 진기록을 이어가게 돼 영광이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아야죠. 대단한 선배들이지만, 저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 달려보려고요.”

INJURY_5일 같았던 5시간
2017년 10월 17일. 서울 SK가 2017-2018시즌 개막 후 불과 2번째 경기를 치렀던 날, 김선형은 끔찍한 부상을 당했다. 우측 발목 외측 인대파열, 복숭아뼈 일부 골절 진단을 받은 김선형은 곧바로 수술대에 올랐고, 긴 재활을 거쳤다. 시즌 막바지 돌아와 데뷔 첫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맛봤지만, 퍼포먼스는 부상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김선형은 인고의 세월 끝에 전성기를 되찾았다. 30대 중반에 커리어하이를 새롭게 만드는 드라마를 썼다.

“평소 부상이 많은 편이었다면 덤덤히 받아들였을 텐데 그렇게 큰 부상은 처음이었어요.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5시간이 5일처럼 느껴지더라고요. 수술이란 걸 처음 받아보니 ‘다시 뛸 수 있을까?’란 걱정도 들었죠. 건강하게 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깨달은 계기가 됐어요. 수술 자체는 잘됐는데 피부에 문제가 있었어요. 뼈가 피부를 찢고 나온 부위, 메스로 찢은 부위의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아서 피부가 괴사 될 위험이 있었죠. 그러면 복귀까지 1년 이상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피부가 자극받으면 안 되다 보니 발목 각도 만드는 재활도 한동안 못했죠. 시즌 막판 복귀했지만 이후 2년 정도 여파가 있었어요. 발목 각도가 안 나왔거든요. 지금은 후유증 같은 건 전혀 없어요. 부상 여파 같은 것도 못 느끼고 비 오는 날 시큰거리지도 않아요.”

MOMENTUM_위기 속에 더 강해진 기사단
SK의 2022-2023시즌 역시 드라마틱했다. 전력 약화, 부상 등 변수 속에 시즌을 맞이한 SK는 1라운드 2승 6패에 그쳤으나 2라운드부터 본격적으로 순위 싸움에 가세했다. 시즌 막판 최준용이 다시 부상을 당했지만, SK는 위기를 기회 삼았다. 5라운드 중반 9일 동안 6경기를 치른 데다 EASL(동아시아 슈퍼리그) 출전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강행군까지 소화했지만, SK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6라운드 전승을 질주하는 등 막판 18경기에서 16승 2패를 기록, 팀 역대 3번째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에 오르며 ‘롤러코스터’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

“시즌 초반에는 팀이 삐걱거렸죠. (안)영준이가 입대했고, (최)성원이는 전역 전이었고요. (최)준용이도 부상으로 빠진 상태였죠. 나머지 선수들끼리 맞춰가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요. 6라운드에 전승했지만, 팀 분위기는 일본 가기 전부터 좋아지고 있었어요. EASL 준우승이 더해지며 선수들의 자신감도 더 올라왔죠. ‘우리가 경쟁력이 있구나’, ‘누가 빠져서 어려운 상황이 와도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물론 체력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죠. 강행군이 이어져서 매 경기 힘들었지만, 그때 코트에서 힘을 써야 할 때와 아껴둬야 할 때에 대해 터득한 것 같아요. 플레이오프 홈 최다연승도 새로 세웠다고 들었어요. 저희는 그만큼 홈에서 더 강하고 자부심도 있죠. 팬들도 플레이오프에서는 더 즐겁게 응원한다는 것이 느껴져서 많은 힘을 얻었어요.”

SPEED_속공에 날개를 달아줬다
최근 3시즌 연속 1위에 오르는 등 SK의 팀컬러는 속공이다. V2를 달성한 2017-2018시즌까지 범위를 늘리면 한 번도 3위 밖으로 밀려난 시즌이 없다. 김선형이 입단한 2011-2012시즌 이후 속공이 5위 미만에 그친 시즌도 2016-2017시즌이 유일하다. 김선형 입단 전 5시즌 동안 SK의 속공은 5위-5위-10위-5위-7위였다. 김선형만의 힘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김선형은 기동력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다. 김선형이 암흑기가 길었던 SK에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 선수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100m는 정확히 재보진 않았는데 12, 13초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저는 달리기가 빠른 편은 아니에요(?). 저보다 더 빨리 뛰는 선수들도 많지만, 저는 평상시와 드리블할 때 속도가 큰 차이 없어서 빠르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속공 능력에 대해 좋은 평가를 받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누구보다 낫다’ 이런 식의 비교보단 ‘이런 스타일에서는 독보적’이라는 얘기를 듣는 게 더 기분 좋더라고요. (속공이나 돌파를 시도할 때 노하우가 있다면?)저만의 내비게이션이 있죠. 저만 쓸 수 있는 내비게이션이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냥 상황이 생기면 ‘이쯤에서 우회전하고, 저기서 좌회전하면 득점입니다’라는 입력값이 나오는 것 같아요(웃음).”

UNLESS_만약 SK가 아니었다면?
김선형이 참가했던 2011 신인 드래프트는 ‘오세근 드래프트’라 불렸다. 오세근은 압도적인 파워에 일명 BQ까지 지녀 10년은 거뜬히 책임질 빅맨이라 평가받은 유망주였다. 2순위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렸다. 김선형도 오세근과 함께 중앙대에 전성기를 안긴 주역이었지만, 최연소 국가대표 출신 최진수 역시 가능성을 높이 평가받은 포워드였다. 결과적으로 SK는 김선형이 지닌 가치를 더 높이 평가, 그에게 팀의 미래를 맡겼다. SK의 선택은 대성공이었다.

“(오)세근이 형이 독보적인 1순위 후보였잖아요. 제가 감독이었어도 세근이 형을 뽑았을 거예요. 2순위에 대한 욕심은 있었죠. ‘세근이 형은 인정, 그다음은 나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감사하게도 SK에서 2순위로 뽑아주셨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단상에 올랐죠. 그래서 10년 넘는 기간 동안 제대로 보답하고 있다고 생각해요(웃음). 2번째 FA 때 제일 마음에 걸렸던 건 잠실학생체육관이었어요. 여기를 원정 선수로 쓴다면 너무 어색할 것 같았죠. 팬들에게서도 떠나지 말아 달라는 연락을 많이 받았지만, 세부 조율 때문에 발표가 늦어졌어요. 팬들이 ‘김선형 선수 없는 SK는 상상이 안 돼요’라고 말씀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NUMBER_“영구결번, 해주시면 영광이죠”
최우선으로 원했던 등번호는 아니지만, 어느덧 5번은 김선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김선형은 한때 5번과 관련된 재능기부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6년 SK의 연고지 서울에 있는 중고교 엘리트 선수 가운데 등번호 5번을 사용하고 있는 유망주들을 초청, 전매특허인 돌파와 드리블 등을 전수했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자비로 선수들과 함께 사우나, 식사를 즐기는 시간도 가졌다. SK에서 은퇴하게 된다면, 영구결번은 예정된 수순 아닐까. 김선형에게 5번을 달게 된 배경, 영구결번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들어봤다.

“중앙대에 입학했을 때 이례적인 일이 있었어요. 코치님이 1학년들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셔서 9번을 고를 수 있었고, 4년 내내 쓸 수 있었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남아있는 번호 중 제일 괜찮아 보였어요. SK에 입단했을 때는 (주)희정이 형이 9번을 쓰고 있었어요. 남아있는 건 5번, (방)성윤이 형이 썼던 7번이었는데 7번은 슈터에게 어울리는 번호잖아요. 그래서 (변)기훈이가 7번을 쓰고 제가 5번을 달게 된 거죠. 고등학교 때는 6번을 썼는데 번호를 크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어서요. 번호보단 프로에 빨리 적응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죠. 영구결번 해주시면 좋죠. 영광일 것 같아요. 문 감독님, 전 감독님 영구결번 보며 ‘내 이름도 저기 걸리면 어떨까?’란 생각은 해봤어요.”

HONEY_“아내 자랑, 1시간 넘게 해도 돼요?”
김선형은 2017년 5월 약 2년 동안 교제해왔던 석해지 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결혼에 앞서 2016-2017시즌 막판 홈경기가 끝난 후 이승기의 ‘결혼해줄래’를 부르며 깜짝 프러포즈, ‘사랑꾼’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김선형은 많은 역경을 석해지 씨와 함께 헤쳐왔다. 김선형이 결혼 직후 끔찍한 발목 부상을 당했을 때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던 석해지 씨는 이후 슬럼프도, 우승의 순간도 함께 해왔다. 한때 김선형의 약점이었던 미드레인지 점퍼에 대해 직설적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연애 초반부터 미드레인지 점퍼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땐 제가 자존심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플로터, 3점슛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죠.” 김선형의 회고다. 그래서일까. 김선형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마지막에 외친 사람은 석해지 씨였다.

“정규리그 MVP는 가장 영예로운 상이잖아요. 가장 높은 자리에서 아내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어요. 아내를 처음 본 날은 2015년 10월 31일이에요. 길에서 이마에 빛이 나는 사람이 있어서 제가 먼저 다가갔어요. 유로스텝 하면서 갔죠(웃음). 공개 프러포즈는 제가 좋아서 준비했어요. 몇 곡을 두고 고민했는데 발라드 부르면 분위기가 처질 것 같더라고요. 선곡은 잘했지만 경기 후 너무 힘든 상태다 보니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어요. 아내 자랑하려면 1시간 넘게 걸려요. 하나만 꼽자면,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저에게도 사랑을 많이 줘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택시 기사님이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분들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아내는 굉장히 존중하며 사람들을 대해요. 내조는 말할 것도 없고요. 시즌 중 집안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손 감각 유지해야 한다’라며 절대 안 시켜요. 온전히 농구에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해줘서 너무 고맙죠. 저희는 일심동체예요. 김선형이 석해지고, 석해지가 김선형이죠. 자랑은 시간 관계상 여기까지만 할게요(웃음).”

YOUTH_“아버님, 감사합니다”
김선형은 어린 시절 축구에 소질이 있었다. 유소년클럽에서 약 2년 동안 축구를 즐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었다. 김선형이 농구와 인연을 맺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놀이터에서 농구를 즐기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가 농구 명문 송도중으로 데려갔다. 테스트에서 합격한 김선형은 6학년 여름방학부터 송도중 선수들과 훈련하며 농구 선수의 길에 접어들었다. 농구계에 종사 중인 사람으로서 김선형의 아버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감사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월드컵을 볼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어요. 우리나라가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0-5로 졌던 기억이 생생해요. 한 골이라도 넣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는데 상대 팀에 있는 베르캄프라는 선수가 너무 잘하더라고요. 축구 할 때 제 롤모델이었죠. 우리 팀이 종종 축구를 즐기는데 저는 축구도 농구처럼 해요. 요리조리 빠져나가서 골 넣는 스타일이죠. 어릴 때부터 농구를 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랭킹에 못 들어가는 선수였어요. 고3 때 갑자기 툭 튀어나온 스타일이었죠.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슛 연습을 조금 더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슛 연습에 시간을 할애했다면 돌파를 연습한 시간도 그만큼 적었겠죠. 다 가질 순 없잖아요. 어린 선수들도 ‘화려한 거 하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스킬 트레이닝 배우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제가 스킬 트레이닝을 통해 업그레이드한 레이업슛, 드리블, 수비 제치는 기술은 그 이전에 수많은 노력을 통해 기본기를 쌓은 게 밑바탕이 됐던 거죠. 저는 기본기를 중시하는 송도고를 나왔기 때문에 기본기를 어느 정도 갖춘 후 프로에 왔고, 여기서 스킬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개인기가 극대화됐어요. 일단 기본기가 갖춰줘야 하는 거죠.”

UPGRADE_12년 걸려 더 달콤한 1위
김선형은 정규리그에서 평균 6.8어시스트를 기록, 1위에 올랐다. 데뷔 12년 차에 처음으로 거둔 쾌거였다. 김선형은 첫 어시스트 1위 등극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선수였다. 종전 기록은 주희정의 10시즌이었다. 주희정이 이상민, 김승현 등에 밀려 2인자에 머문 시간이 길었다면, 김선형은 시야를 넓히는 데에 시간이 걸린 사례였다. 본격적으로 1번 역할을 맡은 데뷔 2년 차 시즌 역시 2.9어시스트에 머물렀다. 올 시즌은 11차례나 더블더블을 작성, 세간의 평가를 뒤집었다. 통산 24회 더블더블을 기록했으니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수치를 올 시즌에 세운 셈이다. 또한 역대 최초로 플레이오프에서 득점-어시스트로 3경기 연속 더블더블을 작성한 선수가 됐다.

“코트를 더 넓게 보려 노력했어요. 빨리 치고 들어가야 할 때, 천천히 넘어가야 할 때에 대해 알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야가 넓어지고 동료들도 더 잘 보이게 된 것 같아요. 요새 들어 농구가 더 재밌게 느껴져요. 물론 처음 1번을 맡게 됐을 땐 모르는 게 많았죠. 언제 공격해야 하는지, 조율해야 하는지 구분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시행착오를 통해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제 타이밍을 아는 거죠. 선수들 위치도 지정해주면서 조립하다 보니 어시스트 능력도 업그레이드된 것 같아요.”

NICK NAME_‘플래시썬’이 장착한 세리머니
최근 들어 ‘98년생 김선형’, ‘신인상 후보’라는 별명도 생겼지만 김선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별명은 ‘플래시썬’이다. 기자와의 점프볼 2013년 1월호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졌고, 이후 김선형을 대표하는 수식어가 됐다. 올 시즌에는 정점을 찍었다. MVP로 선정됐을 뿐만 아니라 손가락으로 번개를 만드는 ‘플래시’ 세리머니까지 선보였다. “이제는 이름보다 ‘플래시썬’이 더 많이 언급되더라고요. 이름만큼이나 자부심을 느끼는 닉네임을 만들어주셔서 고맙죠. 지난 시즌 우승 후 SK텔레콤에서 제작하는 유튜브에 감독님과 함께 출연한 적이 있어요. 특별한 세리머니는 없는지 물어보셔서 즉흥적으로 번개 세리머니를 하겠다고 답했어요. 중요한 순간에 득점하면 세리머니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KT전에서 덩크슛하는 순간 갑자기 공약이 떠오르더라고요. 팬들도 너무 좋아해 주셨죠.”

GLORY DAY_영광의 시대
“다시는 전성기가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저도 이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해 놀랐습니다. 저에게 영광의 시대는 지금인 것 같아요.” 김선형이 정규리그 MVP로 선정된 후 남긴 소감이었다. 김선형은 데뷔 후 줄곧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스타였다. 뛰어난 돌파력을 발휘하며 단숨에 SK의 간판이 됐고,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따냈다. 강병현을 상대로 인유어페이스를 터뜨리는가 하면, 중국전에서는 이젠리엔의 블록슛을 피해 속공 덩크슛도 성공시켰다. 운동능력이 최전성기일 때 하이라이트 필름을 여러 차례 만들고, 많은 우승도 경험했던 김선형이 30대 중반을 넘긴 지금을 ‘영광의 시대’로 꼽은 이유는 무엇일까.

“광저우 아시안게임 최종명단에서 떨어졌을 때 (양)동근이 형, 이규섭 위원님이 방으로 찾아와서 다독여주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드리는데 눈물이 터져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한동안 울보라고 엄청 놀림 받았죠(웃음). 그때 대표팀에서 떨어진 게 더 성장하는 데에 동기부여가 됐어요. 이후 기뻤던 순간은 있었지만, ‘영광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구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기량으로 봤을 때 전성기는 2017 아시아컵이라 생각하는데 이후 부상을 당했죠. 생각해보면 한동안 전성기라 여겼던 그때보다 지금이 나은 것 같아요. 최전성기죠. 한때 ‘우승 못 하고 은퇴할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2017-2018시즌 우승했을 때 눈물이 났죠. 시리즈 내용도 극적이었고요. 지난 시즌 우승했을 때도 다른 의미에서 눈물이 났지만, 최근 시상식에서 ‘영광의 시대는 지금입니다’라고 했잖아요. 나중에 ‘잘못 생각했습니다. 지금이 그때를 뛰어넘는 영광의 시대입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도록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노력해야죠.”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박상혁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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