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가 올려 의사 더 뽑아야죠... 근데 그 수가, 병원이 다 가져갈 걸요?"
'정원 확대-수가 인상' 논쟁 총정리(심화편)
편집자주
한국은 의료 가성비가 좋다고 하죠. 아프면 예약 없이 3,000~4,000원에 전문의를 보는 나라,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나 건보 흑자, 일부 의료인의 희생 덕에 양질의 의료를 누렸던 시대도 끝나 갑니다. 지방 병원은 사라지고 목숨 살리는 과엔 지원자가 없는데,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입니다. 의사 위상은 높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의료 효능감은 낮아지는 모순. 문제가 뭘까요? 붕괴 직전에 이른 의료 현장을 살펴보고, 의사도 환자도 살 공존의 길을 찾아봅니다.
※'정원 확대-수가 인상' 논쟁 총정리(기초편) 기사에서 이어집니다.(https://hankookilbo.com/News/Read/A2023050112380003494?did=NA)
필수의료 분야 수가나 인건비가 제대로 보전되지 않는다. 정부 지원이 미흡해 필수의료 기피를 부추기고 있다.
(이필수 대한의사협회 회장 의학신문 기고문)
18년 동안 의대 입학 정원이 축소·동결돼 만성적 의사 부족을 겪고 있다. 권역별 공공의대 신설과 함께 의대 정원 최소 1,000명 증원이 필요하다.
(경제정의실천연합 기자회견문)
필수의료와 지방의 의사 부족 문제 해법을 주장하는 양극단에는 건강보험 의료수가(국가가 정한 의료 서비스 가격으로 의료기관이 환자와 건보공단에서 받는 돈)와 의대 정원 문제가 있다.
시민단체와 보건의료행정 전문가들은 "의대 정원을 확 늘려 의사 수를 확충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강조하고, 의사단체 등은 "필수의료에 야박한 수가체계 개편 없인 정원을 늘려봐야 새로 배출될 의사들도 전부 '돈 되는 로컬(개원가)'로 빠질 것"이라고 맞선다.
해법은 양자택일로 불가능하다. ①'적정 수준' 의사 증원과 ②'적재적소' 수가 개선이 동반되어야 필수의료와 지방의료에 인력을 충원하고, '시한부 한국 의료'를 지속가능하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은 앞선 기사('정원 vs 수가' 출구 없는 싸움... 악마도, 해법도 디테일에 있다)에서 살펴봤다.
※관련 기사: https://hankookilbo.com/News/Read/A2023050112380003494?did=NA
이제는 △어떻게 충원할지 △어떤 수가를 어떻게 올려줄지, 진전된 논의로 이어가야 할 시점이다.
정원 확대를 둘러싼 백가쟁명
우선 3,058명으로 고착된 의대 정원을 얼마나 늘릴지 문제가 있다. 다양한 숫자가 나오지만, 적정 규모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증원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당사자 단체인 대한의사협회(의협)가 결사적으로 반대해 논의 자체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공개적으로 언급된 몇몇 숫자를 살펴보면, 연간 300명 대부터 1,000명 이상까지 스펙트럼이 꽤나 넓다. 박은철 연세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2000년 의약분업 후 의사단체와 정부 간 합의에 따라 줄인 '정원 351명'을 원상복구 시키는 방안을 제시했고, 경실련 등 더 강경한 증원파 측에서는 '최소 1,000명'을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는 "연간 400명씩 10년 간 한시적으로, 총 4,000명을 더 뽑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어떻게' 늘려야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늘리냐'다. 증원 목적은 인력이 실시간으로 이탈 중인 필수의료와 지방병원 의사를 충원하는 것. 여기선 "지금 구조론 정원 늘려봐야 돈 안 되고 힘든 기피과는 어차피 안 간다"는 의사들 지적에 일리가 있다. 그냥 숫자만 늘려선 소용이 없다.
물론 '의사 공급 제한'을 풀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기는 하다. 의사가 늘면 피부·미용, 통증 같은 진료 분야가 레드오션이 되고, 결국 많은 의사들이 바이탈과(환자 생명과 직결된 의료 분야)를 선택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도 '기대'일 뿐, 효과를 확신할 수 없다. 현 제도 하에서는 의사의 진료과목이나 근무지를 강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아예 의대생을 뽑을 때부터 과목이나 근무지를 정해서 뽑자"는 말도 나온다. 실제 이런 방식을 활용한 게 일본의 '지역정원' 제도다. 지방의대 생활 6년간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받는 대신, 의사 면허 취득 후 지역 내 기피과에서 9년 간 근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의무 복무를 어기면 받았던 장학금을 150%로 반납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제시했던 공공의대 신설과 '10년 의무복무 지역의사제'도 이와 유사한 구상이다. 지역 필수 공공의료에 종사할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국가가 선발(지역 인재 전형 비중 확대), 교육, 훈련(공공의료에 맞는 커리큘럼)을 지원한다는 건데, 다만 이 '10년' 안에 통상 4, 5년인 수련기간에 군 복무기간(공보의 37개월·군의관 38개월)이 포함되다 보니, 실질 의무복무 기간이 길지 않다는 지적도 많았다.
반강제성이 있는 지역의사제 같은 '별도 트랙'보다, 차라리 지방 의대에서 해당 지역 출신 인재를 많이 뽑아 연고지에 정착하도록 유도하는 게 실효성 있다는 의견(신영석 한국보건행정학회장)도 있다. 실제 부산·울산·경남 지역 의대는 지역 인재를 많이 뽑는 추세다. 부산의 의대를 졸업한 30대 의사는 "연고지가 아닌 지방(비수도권)을 찾아가는 의사는 못 봤지만, 출신 대학이 위치한 부산에 남은 동기들은 꽤 많다"고 말했다.
의사단체 '바른의료연구소'는 공공의사 면허를 따로 도입하자는 주장도 한다. 지역 배치를 할 수 있는 '의사 공무원'을 양성하되, 공공병원에서만 일하게 하고 민간영역은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원은 별도 트랙으로 뽑고, 교육은 기존 의대에 위탁하는 식이다. 다만 '돈을 덜 받는' 공무원 의사가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지, 이탈 없이 중증·응급 분야의 고된 업무를 장기간 수행할 수 있을지 우려도 존재한다.
수가 정말 필요한 곳에 올려줘야
의사는 좀 더 흔할 필요도 있어요. 그래야 이상한 의사들도 퇴출될 거거든요. 하지만 '의대생 많이 뽑으면 흉부외과 의사도 늘 것'이라는 얄팍한 논리엔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흉부외과에 오려다가 못 오는 친구들 이유를 보면 ①오면 힘들까봐 ②수련 환경이 나빠서 ③선배들 보면 비전이 없어서 ④돈을 너무 못 벌까봐 등이에요. 이런 장애물 해소 없이 정원 확대한다고 절대 기피과 충원으로 이어질 수 없어요. 많은 연결고리가 필요해요.
(정의석 강북삼성병원 흉부외과 교수)
의사들 주장의 핵심은 근무 여건을 개선하고 보상을 늘리라는 것이다. ①여건이 개선되면 바이탈과에 관심 있는 사명감 있는 의사가 대학병원에 더 남을 것이며 ②지방 근무를 기피하는 것은 직종을 막론하고 똑같으니 보상을 '대폭' 강화하지 않는 한 해결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그러나 건강보험 재정에도 한계가 있어 수가를 '너도나도 올려주기'는 불가능하다. 대형병원에서 중증·응급 환자를 보는 필수의료 근무 의사를 우선적으로 지원하고, 비급여 항목이나 의료 이용량 등 조정할 부분은 조정해 국가 차원의 '의료 가계부'를 다시 쓸 필요가 있다.
현 정부가 일단 내놓은 필수의료 대책 중 하나는 '공공정책수가'다. "의대 정원 확대와 함께 공공정책수가를 대폭 강화해, 늘어난 의사들이 필수의료로 이동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는 것이다. 올해 1월 복지부가 발표한 대책을 보면 △지역수가 도입 △야간·휴일 당직 보상 △고위험·고난도 수술 보상 강화가 지원 대상이다.
정의석 강북삼성병원 흉부외과 교수는 "없는 수가부터 일단 만들자"고 주장했다. 그는 "몸에서 가장 큰 혈관인 대동맥이 찢어지는 대동맥 박리 수술은 수가도 책정돼 있지 않아 대동맥 상행 수술 수가로 대신 청구한다"며 "결국 대동맥 박리가 연간 몇 건 발생하는지 모른다는 것인데, 근거 자료가 없으니 수가 책정 논의도 없다가 최근에서야 협의 중"이라고 지적했다.
"가산수가도 일괄해서 올릴 게 아니라 꼭 필요한 곳에 집중해서 줘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지방 상급종합병원에서 일하는 교수 A씨(익명 요구)는 "필수과 의사 부족 문제는 동네 의원이 아니라 대형병원에서 중증 환자 볼 의사가 없어 생기는 문제"라고 전제했다. 그는 "정부가 필수의료 살리겠다면서 수가 올릴 때는 개원의가 주로 하는 맹장수술, 담낭절제술 수가는 많이 올리고 중증 위암이나 대장천공 수술을 안 올리는 일이 계속 반복됐다"면서 일침을 놓았다. 흉부외과 수가도 개원가에서 주로 맡는 하지정맥류 수가만 대폭 올랐다. 그는 "정부 협상 파트너인 의협이 의대 교수보다 개원의가 주류고,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교수는 하도 바빠서 논의에 참여할 기회도 적다보니 생기는 문제"라며 "복지부도 다 알면서 (개원가 목소리에) 휘둘린다"고 비판했다.
계속해서 A 교수는 분만수가 인상 문제를 예로 들었다. 그는 "고위험 산모, 다태아 분만 등 중증 환자 수가를 서너 배 올려야 중증·응급 분만할 의사가 늘어나는데, 그런 정교한 설계 없이 일괄로 올리니까 개원의만 앉은 자리에서 3배(지역수가 100%+안정정책수가 100%)를 버는 셈"이라며 "당장 로컬병원에서 산부인과 전문의 연봉을 1억, 2억 원씩 올려준다 하니 대학 교수도 줄줄이 사표를 낸다"고 현장의 실태를 전했다. 그가 일하는 대학병원에서도 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신경외과·신경과 교수들이 올해 초 개원가나 2차 병원 등으로 줄줄이 이탈했다고 한다.
수가를 올리면 꼭 사람을 뽑아야
정부가 수가 개선을 해도 병원장이 다 해먹고 인력충원 안 하고 (노동력) 갈아먹을까 걱정입니다. 동기 중에 사명감 있고 바이탈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 많았는데 반은 바이탈 가고 반은 꿈을 접었습니다.
(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협조로 연 '바이탈과 전공의·전문의 익명채팅방'에서, 젊은 의사들은 필수의료 인력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 중인 각종 부조리들을 지적했다.
한 전공의는 말했다. "3차 병원에서 의사가 부족한 건, 배출 전문의 수 자체가 부족한 게 아니라 거기서 일할 대학교수 정원(TO)이 부족한 겁니다. 소수의 교수·전공의·전임의의 '노예 같은 노동'으로 대학병원이 굴러가는 현실입니다. 대학병원은 적자라서 추가 고용을 못한다지만, 분원이 우후죽순 생겨나는데 빤히 보이는 거짓말입니다."
현장 의사, 보건의료행정 전문가, 시민단체의 의견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대형병원이 전문의를 더 많이 고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강민구 대전협 회장도 "전문의 수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근로 여건과 봉급 같은 처우 문제 때문에 대형병원에 남는 전문의가 너무 적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번아웃으로 이어지는 외과의사의 '퐁당퐁당' 격일 당직도, 환자 입장에서 답답한 '1분 진료'도, 그냥 의사가 아니라 '그 병원 의사'가 더 많아야 해결된다. "전문의가 해야 할 일을 주 88시간 일 시켜도 되는 전공의가 대신하고 있다"는 젊은 의사들 푸념도 해결할 방안이다.
다만 고용주인 대형병원의 입장에서는 교수나 입원전담의(호스피탈리스트) 같은 전문의 1명을 채용할 돈이면 전공의 서너 명을 더 오랜 시간 '굴릴' 수 있으니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유인책'이 필요한 이유다. 복지부도 2월에 발표한 보도자료에서 "상급종합병원 지정·평가 기준에 입원전담전문의 기준 및 중환자실 병상 확보율을 신설하고, 예비지표에 중증·응급, 소아응급 진료기능을 확충할 수 있도록 추가 반영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대형병원들의 볼멘소리는 있겠으나, 이런 당근과 채찍이 없이 수가만 올려주는 것은 '헛돈' 쓰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의료 붕괴 전에 제대로 뜯어고쳐야
전문가들은 정원, 수가 문제 말고도 지속가능한 의료체계를 만들기 위한 과제는 산적해 있다고 말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법 같은 건 없다는 말이다.
지속가능할지 여부를 가릴 핵심은 '돈' 문제다. 인구 고령화로 의료수요 폭증은 예견된 상황에서 △건보료 인상과 정부 재정 투입으로 건보 '수입'을 늘리든가 △의료 이용량 억제와 병상 규제, 지불제도 개편 작업 등으로 '지출'을 줄이든가,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제도를 손보지 않으면 의료 붕괴가 찾아올 것이라는 예측이다.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한국 의료 시스템에 '시한부 선고'를 내렸다. "지금의 한국 의료 시스템이 유지되는 건 정말 얼마 안 남았습니다. 향후 5년 뒤에 건보 적립금이 고갈되면 그때는 정말 비싼 값을 치르고 뜯어고쳐야 할 거에요. 그 값은 돈일 수도 있지만, 환자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시스템이 망가진 사이 환자가 죽고 악화하는 겁니다. 지금 제대로 못 바꾸면 정말 힘들어질 겁니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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