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신 몸’ 전화국 전화기의 황당한 시간외 영업[선데이서울로 본 50년전 오늘]

박효실 2023. 5. 4.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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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註 : 50년 전인 1973년 5월, ‘선데이서울’의 지면을 장식한 연예계 화제와 이런저런 세상 풍속도를 돌아본다.

tvN ‘응답하라 1988’ 의 한 장면. 출처 | tvN


[스포츠서울] ‘선데이서울’ 238호(1973년 5월 6일)에 황당한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기사는 경남 진주에서 있었던 로칼뉴스로 제목은 ‘전화 값 뛰자 기묘한 돈벌이’다.

국가기관인 진주 전신전화국 전화를 근무시간 외에 개인 영업점에 빌려주는 기발하지만 황당한 로칼뉴스가 관심을 끌었다.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전문 그대로 옮긴다.

요즘 진주 시내에서 전화값이 대당 30만 원으로 폭등하자 기묘한 방법으로 돈 버는 방법이 선보였다고….가령 4022번은 진주전화국 업무과장석에 설치된 관공서 전화인데 하오 5시만 되면 진양호 옆 H살롱 전화로 둔갑. 업무과장 이 모씨는 “사무용 전화의 시간 외 활용책으로 지난 4월 7일 전화국장 내부 승인을 받아 시도해 본 것이다. 이것이 성공하면 점차 확대해 나갈 예정이다”라고 서슴없이 해명. “업무과장님 술 심부름에 바쁘시겠습니다요.”

내용을 보면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코미디 같은 일이다.

당시 전화국은 체신부 산하 국가기관, 직원은 공무원 신분이었다. 여기저기 전화가 필요한 사람은 많은데, 전화가 부족하니 전화기 값(전화 선로값이라는 편이 더 정확하다)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야간에 진주 전화국 관용 전화기를 개인 유흥업소에 임대해준, 정말 코미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대낮에 전신전화국 업무과장 자리 전화로 저녁 술자리 예약 들어오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또 수시로 “살롱이냐?”고 묻는 전화가 걸려 온다면 이 또한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국가 수입을 올리기 위한 것이었는지, 돈에 눈이 멀어 주머니를 채워보려는 심보에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부족한 전화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 보려는 진심의 아이디어였는지, 공무가 끝난 시간에 이른바 전화기 시간 외 활용책의 진의를 알 수는 없다.

tvN ‘응답하라 1988’ 의 한 장면. 출처 | tvN


그러면 이 같은 코미디가 벌어진 그 시대 사정을 좀 알아보자

1970년대 전화값은 엄청나게 비쌌다. 전화값이라고 했지만 사실 회선값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전화는 사치품이나 다름 없었다. 전화는 사회적 경제적 수준을 나타냈다. 가정집 전화가 얼마나 귀했는지 1970년대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집에 전화를 들여놓는 날은 신기한 보물, 귀한 손님이 온 것처럼 반가움과 기쁨이 넘친다. “우리 집에 전화를 놓았다”는 소식을 동네방네 알리고 축하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웃에 전화가 있는 집도 복 받은(?) 집이었다. 긴급한 연락을 그 집 전화로 주고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늘 미안해 했고 가끔은 사례도 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학년이 바뀔 때마다 가정환경을 조사했고 항목에 전화 유무가 들어 있었다. 그것이 부잣집인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기준이 되었다. 시골에서는 설문 자체가 별 의미 없었지만 해마다 되풀이됐다. 그 시대 서민들에게 전화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기록을 찾아보면 1960년대 전화 1대 가격이 거의 서울의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전화기가 30만 원일 때 서울 주택 가격이 25만~100만 원 수준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어느 지역 어느 수준의 집인지 잘 알 수 없지만 그만큼 비쌌다는 의미이다.

이삿짐센터의 ‘2424’, 복덕방의 ‘4989’, 장의사의 ‘1919’처럼 영업상 절묘한 전화번호, 또 좋은 번호라는 것은 부르는 게 값이어서 어떤 번호의 전화는 한때 260만 원을 넘었다는 말도 있다.

늘어나는 수요를 공급이 따르지 못하니 값이 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전화를 둘러싼 매매, 임대 등을 둘러싼 갖가지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는 1970년 9월1일 개선책을 내놓는다. 그날 이전 전화는 백색, 이후는 청색전화로 이원화한 것.

백색전화는 종전대로 매매를 허용하고, 청색전화는 거래를 금지했다. 이사를 가면 반납한 후 간 곳에서 다시 받는 이른바 전화 공영제 같은 것이었다. 이사 간 곳에 회선 여유가 없으면 전화는 꽝이다.

청색전화를 신청해도 몇 년 후, 그것도 운이 좋아야 겨우 전화선을 연결할 수 있을 정도로 적체가 심했다. 기술 부족으로 대용량 교환기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80년대에 이르러 모든 마을에 전기를 공급하게 된 정부가 이번에는 모든 마을에 전화를 들여놓는 정책을 추진했다. 1986년 우리나라 기술에 의한 전전자 교환기가 개발되면서 극심했던 전화 공급 문제는 일시에 풀렸다.

천정부지로 올랐던 백색전화 가격은 금방 떨어졌다. ‘공급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실현된 경우였다. 전화를 투기 대상으로 삼았던 백색전화 소유자들은 하루아침에 집 한 채를 날렸다. 폭락이라는 면에서 보면 마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튤립 소동과 비슷했다.

말만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전화를 달아주고 저마다 자기 전화를 한 대씩 가지고 다니는 오늘날을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50년 전 전화가 귀하신 몸이었던 시대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국가기관 진주 전화국의 전화 야간 임대(?)사건은 전화 품귀현상이 빚은 그 시대의 코미디였다.

자유기고가 로마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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