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시작부터 너덜너덜한 전세피해 특별법

이하은 2023. 5. 4.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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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 특별법 발의…까다로운 기준·피해 복구도 어려워
여론 지적에 뒤늦게 수정…지원 방안은 아직 '백지'
피해 분석 없는 대책…피해자도 "전수조사 먼저"

국회가 3일 오전 '전세사기 피해 지원을 위한 특별법' 두 번째 논의에 들어갔다. 소관 상임위인 국토교통위원회는 지난 1일에도 특별법 심사를 진행했는데, 장장 6시간에 걸친 회의에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법안소위에 참석했던 위원들은 '전세사기 피해를 지원하겠다'는 원론적인 말만 남겼다.

논의 대상은 총 3개 법안이다.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는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 안정에 관한 특별법', 조오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주택 임차인의 보증금 회수 및 주거안정 지원을 위한 특별법',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임대보증금미반환주택 임차인 보호를 위한 특별법'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이 전세사기특별법을 설명하고 있다/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세 가지 법안을 모두 논의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당정이 추진하는 법안이 중심이다. 당정은 전세사기 피해자가 해당 주택을 직접 매입할 수 있도록 대출 등을 지원하고, 피해자가 매입을 원치 않을 경우 정부가 매입해 공공임대로 거주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문제는 이 법안이 구심점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법안의 내용을 처음 발표했는데, 곧바로 비판이 쏟아졌다. 각종 지원 대상인 '피해자'를 정의하는 방법이 모호하고,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지적이 많았다.

결국 정부는 지난 1일 첫 법안심사를 앞두고 적용 기준을 처음 보다 낮췄다. 주관적 평가가 적용될 가능성이 컸던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 △보증금의 상당액이 미반환될 우려 등의 항목은 삭제했다. ▷관련 기사:전세사기 피해 대책 영끌했지만…벌써 사각지대 걱정(4월27일)

수정안에 따르면 전세사기 피해자는 대항력과 확정일자가 없더라도 임차권 등기만 마치면 된다. 경·공매가 진행되지 않더라도 임대인이 파산, 회생 절차를 개시하는 경우 등이 추가로 허용된다. 

최근 전세사기 신고가 쏟아진 서울 은평구 빌라 모습/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허둥지둥하는 정부의 모습에 피해자의 불신과 고통은 깊어만 간다. 애초 피해 사례에 대한 면밀한 분석 없이 나온 대책이라는 시각이 많다. 정부는 수정된 기준에 따라 인천 미추홀구 피해 주민의 99%가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만 설명했다. 처음 기준을 고수했을 경우 피해자 중 얼마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는 따로 공개하지 않았다.

뒤늦게 기준이 완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 가능성이 있다는 게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최근 전세사기 신고가 쏟아진 경기도 구리·동탄, 서울 은평구 등의 피해자가 보장받을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미추홀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선 실태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급기야 한시라도 피해 복구가 절실할 피해자들의 입에서 '성급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앞으로 전세사기가 얼마나 확산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나와선 안 된다는 호소다.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는 지난 2일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법안이 아니라 피해자를 걸러내기 위한 법안"이라며 "정부가 전수조사를 통해 피해 유형을 나누고 지원책을 도출한 뒤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인천 전세피해지원센터 전경/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가장 중요한 '지원방안'도 아직 백지상태다. 당정은 전세보증금 반환 채권 매입은 절대 불가하다는 방침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채권 매입 등을 통해 전세사기 피해자에 전세보증금을 우선 돌려주고, 추후 임대인 등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선 구제 후 구상'을 요구한다. 양측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특별법 제정은 더욱 늘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의 강경한 태도도 피해자들에겐 또 다른 상처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채권 매입에 대해 "선을 넘으면 안 된다"고 발언하고, "전세사기가 사회적 재난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당국자로서 지원의 경계를 명확히해야 하는 점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선을 나누는 듯한 태도는 오히려 사회적 분란과 분열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는 원 장관의 말을 빌려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작년 10월 서울 강서구 '빌라왕'이 사망하며 전국의 전세 세입자들이 위협을 받기 시작한 뒤 7개월이 흘렀다. 그새 피해자가 수천 명으로 증가하며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지만, 이렇다 할 피해지원도 공감의 모습도 없다. 정부는 확실한 정책 근거를 마련하고, 국회는 신속한 합의를 이뤄내 피해자의 불안이 하루빨리 해결되길 바란다.

이하은 (lee@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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