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개 중 놓친 퍽 6개뿐…허은비 “일등 아니면 용서 안 돼요”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 간판 골리
한국 2부 승격 이끌며 무결점 방어
“내년 대회 때도 뭉치면 큰일 내”
“이틀간 하루 16시간씩 잤어요.”
4월 경기도 수원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대회에서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를 사상 첫 2부 리그(디비전1 그룹A)로 승격시킨 주역도 몰려오는 피로 앞에서는 꼼짝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온몸이 쑤시고 몸살까지 났지만, 꿀맛 같은 잠으로 기운을 충전하니 한결 몸이 가볍다고 한다. 5전 전승으로 대회를 마치면서 131개 상대 슈팅 가운데 그가 놓친 것은 6개뿐이었다. A매치 데뷔 무대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펼친 ‘철의 수문장’ 덕분에 한국 여자아이스하키는 새로운 무대로 도약하게 됐다.
하루아침에 스타로 뜬 여자 대표팀 골리 허은비(21·코네티컷대)를 지난 26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전광석화처럼 날아오는 퍽을 막으면서 몸이 반응하고 진화한 결과일까. 헬멧과 보호대 등 장비를 벗은 간편복 차림이지만 눈빛은 날카롭다. 무결점에 가까운 방어율을 칭찬하자, 허은비는 “아니다. 심장이 엄청나게 뛰었고, 긴장도 많이 했다. 다른 선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최대한 숨겼다. 그 나머지는 즐기면서 했다”고 답했다.
아이스하키에서는 골리의 전력이 승패를 가르는 핵심 요인으로 꼽힌다. 허은비는 “나는 잘 모르겠다. 내 뒤로 퍽이 넘어가면 진다는 생각으로 무조건 악착같이 막는다”라고 했다. 1m71의 작지 않은 키에 10㎏ 이상의 장비를 짊어지고 쉴새 없이 쭈그렸다 일어서는 동작을 반복하면 무릎에 무리가 온다. 단단한 퍽에 잘못 맞으면 멍들기 일쑤다. 하지만 그는 “경기 시작 5분만 지나도 몸에서 땀이 난다. 아픈 것은 문제가 아니다. 손흥민도 참았다. 언니들과 함께 싸워 승리할 때의 그 짜릿함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 동생 따라 링크에 갔다가 엉겁결에 스틱을 잡은 허은비는 2018 평창겨울올림픽 출전 선배들과는 나이 차가 있다. 하지만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둔 대표팀의 연습 상대로 뛸 정도로 잠재력이 있었고, 청소년대표팀과 캐나다의 하키 아카데미 유학을 거쳐, 지난해 미국의 코네티컷 대학에 하키 장학생으로 진학하면서 대표팀의 간판 골리로 입지를 굳혔다.
세계대회 준비를 위해 휴학한 그는 “2부 리그에 진출할 기회를 꼭 잡고 싶었다. 대회 한 달 전부터 경기 시간에 맞춰 먹고, 자면서 사이클을 맞췄다. 대회 3일 전부터는 장비를 착용하는 시간까지 실제 경기에 맞춰 준비했다. 오랜 정성이 통한 것 같다”고 말했다.
허은비는 동작전환의 스피드, 튄공 잡아채기, 안정감, 일대일 대응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기술만 좋다고 좋은 골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골리는 경기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팀의 전술 시스템을 파악해 시시각각 상황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못 말리는 승부욕도 그의 성격의 일면이다. 허은비는 “어렸을 때부터 뭐든지 일등 아니면 용서가 안 됐다. 대표팀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다 이겨야 한다”고 했다. 이번 세계대회 3차전 슬로베니아와 경기(4-2 승)에서 이겼지만 어이없이 실점한 것을 참을 수 없어 혼자 울었다. 주장 한수진이 알아채고 다가와 위로했지만 눈물은 더 쏟아졌다고 한다.
집념이나 독기는 운동 선수한테는 미덕이다. 캐나다 하키 유학 시절 못하는 영어로 친구를 사귀고, 졸업할 때는 수학상, 학점상, 운동상 등 4개의 상을 휩쓴 것은 인내력 강한 운동선수가 공부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나는 적응력이 뛰어나다”며 웃었다.
그런 허은비에게 내년 예정된 세계대회 2부 리그 무대는 커다란 고비다. 이번에 잘 싸웠지만, 한국 여자아이스하키의 현실은 열악하다. 고교나 대학팀은 하나도 없고, 실업팀은 수원시청이 있을 뿐이다. 어린이 클럽이 활성화돼 있다고 하지만, 초등학생을 포함한 등록 선수는 500명 안팎이다. 대표팀의 2부 리그 승격이 대단한 성과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늘 자신감 넘치는 허은비는 “내년 2부 리그에서 맞서게 될 팀들이 모두 강팀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각 팀에 맞는 전략을 짜면 된다. 우리가 개인기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뭉치면 훨씬 큰 힘을 낸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연습을 이틀만 쉬어도 불안하다”는 허은비를 보면, “빠르고 거친” 아이스하키의 특성이 허은비의 전투욕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안 해보면 모른다”는 그의 각오에서 내년 세계대회 기대감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여자아이스하키의 새로운 도전, 그 중심에 허은비가 있다.
김창금 선임기자 kimck@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국민 60% “대한민국 민주주의, 1년간 역주행”
- 윤 대통령 당선 이끈 30대도 등돌렸다…공정성에 낙제점
- 미 연준, 기준금리 0.25%p 올려…인상 멈출 가능성 시사
- 윤 대통령 1년 부정 평가, ‘매우 잘못’이 ‘다소 잘못’의 2배
- 로버트 드 니로 단골 ‘킴스비디오’ 주인 용만씨의 파란만장 인생
- 안철수, 이진복 겨냥 “아무 일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생겨”
- [단독] ‘이태원 참사’ 소방본부 첫 내부평가…“대응 미흡했다”
- 배달앱들 사활 건 ‘할인 레이스’…시장 축소에 공공배달까지
- 지지층에 갇힌 윤 대통령…‘반대 세력과 소통 노력’ 28.1%
- ‘들길 따라 나무 세그루 밑’ 75년 전 나치 보물지도…나무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