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고 좋은 코스 아냐···굿샷과 실수 변별력 있어야”[코스 셋업의 세계②]
14개 클럽 모두 사용···리커버리 능력도 테스트
단체 성격따라 셋업도 차이···US오픈 ‘악명’ 높아
“룰, 설계, 잔디, 토양, 날씨 고려하는 종합예술”
골프는 자연과의 싸움이다. 대지 위에 자라는 풀과 나무, 돌멩이와 바위, 비와 바람···, 이 모든 게 골프라는 게임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다. 그래서 골프를 신의 뜨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손길이 완전히 배제된 건 아니다. 코스에는 기본적으로 설계자인 인간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어떻게 셋업 하느냐에 따라 코스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코스 셋업의 중요성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는 무대가 US 오픈이다. 미국골프협회(USGA)가 주관하는 US 오픈은 선수들을 괴롭히는 ‘익스트림 챌린지’로 유명하다. 2018년 대회 때 필 미컬슨은 그린에 볼이 멈추지 않자 굴러가는 볼을 홀 쪽으로 퍼팅하는 기행을 저질러 비난을 샀고, 2020년에는 코스 셋업에 “넌덜머리가 난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에 비해 어떤 대회에서는 4라운드 합계 우승 스코어가 30언더파까지 치솟기도 한다.
과연 좋은 코스 셋업은 어떤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골프협회(KGA)에서 룰을 담당하고 있는 구민석 차장으로부터 코스 셋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구 차장은 각종 해외 투어 대회에 KGA를 대표해 나가기도 한다. 올 2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오만에서 열린 아시안 투어 대회에서 레프리로 활약했다. 3월 각국 룰 전문가들이 영국 R&A에 모인 회의에도 KGA를 대표해 참가했다.
공정한 평가를 위한 조건들
골프는 멀리 치기 대회가 아니다. 정확하게 치는 능력도 중요하다. 따라서 페어웨이 폭을 때론 좁게 조절하고 홀 위치도 알맞게 설정해야 한다. 무조건 어렵다고 해서 좋은 셋업은 아니다. 잘 친 샷과 못 친 샷에 대한 변별력이 있어야 하고 스코어가 운에 좌우돼선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때론 실수를 했을 때의 리커버리 능력도 테스트하고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각 홀의 길이도 다양해 골프백에 있는 14개의 클럽을 18홀 동안 한 번씩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거리도 공중에서 떠서 가는 캐리와 굴러가는 런이 있다. 페어웨이를 단단하게 조성하면 런이 증가하고 반대로 부드러우면 런이 감소한다. 선수들은 이런 조건을 감안해 높이 띄울지, 낮게 깔아 칠지 결정해야 한다. 구 차장은 “코스 셋업은 이런 다양한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것으로, 이 요소들을 충실히 반영했을 때 ‘좋은 셋업’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코스 셋업은 대회 주관 단체 경기위원회의 몫이지만 골프장 코스관리팀과의 협업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저희는 대회를 따라 돌아다니는 사람들인데 비해 코스관리팀은 해당 골프장의 특성 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이 분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해요.”
경기위원회와 골프장의 입장이 충돌할 때도 있다. 바로 ‘영업’ 때문이다. 국내 골프장은 대회 직전까지 일반 이용객을 받는 경우가 많아 러프를 마음대로 기르지 못한다. 그렇다고 단기간에 기를 수도 없다. 한국형 잔디는 한꺼번에 기르면 잎이 아니라 줄기가 올라온다는 게 구 차장의 설명이다.
“우리는 대회가 끝나고 떠나면 되지만 골프장은 계속 잔디를 관리를 해야 하는 입장이에요. 더구나 올해 한꺼번에 잔디를 기르면 다음 해에는 아주 뻣뻣한 잔디에서 대회를 치러야 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죠.” 이런 이유로 코스 셋업은 골프장과의 장기적인 협력 프로젝트가 될 수밖에 없고, 상당한 인력과 장비가 투입돼야 한다.
다양한 변수···외부 전문가 집단과 협업 필수
날씨와 계절도 변수다. 코스 셋업을 위해서는 최소 3개월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한데 그 사이 이상기후가 발생하면 원하는 잔디 생육을 조절할 수 없게 된다. 만약 러프를 충분히 기르지 못했다면 그 대안으로 그린을 어렵게 하는 방법 등으로 난도를 조절한다. 장마철에는 낙뢰가 잦기 때문에 대피 계획도 미리 짜야 하며 기상 전문가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난도 조절의 가장 쉬운 방법은 코스 길이다. 하지만 길이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오래 전 만들어진 코스의 경우 요즘 프로골퍼들은 벙커나 개울 등 페어웨이 중간의 장해물을 훌쩍 넘겨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최근 전 세계 규칙을 관장하는 영국의 R&A와 USGA가 볼의 비거리 성능 제한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길이와 관계된 랜딩 존의 경우 한국 오픈은 굴러가는 거리까지 포함해 250m 전후로 설정한다. 남자 아마추어 엘리트 선수 대회는 220m, 초등부 경기는 200m를 기준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기준도 지형이나 잔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형 잔디보다 양잔디가 깔린 페어웨이에서 런이 많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내리막 지형이라면 랜딩 존은 더 멀어지는 것이다.
길이와 더불어 난도 조절의 또 다른 핵심은 홀 위치다. 핀을 어디에 꽂느냐에 따라 공략 방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러프나 그린 스피드 등도 난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린은 무조건 빠르게 할 수 있을까. 구 차장은 “아니다”고 했다. “그린을 빠르게 하려면 롤러로 누르는데 잔디가 평소에 그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면 뿌리가 떨어져 버려요. 당장 3~4라운드부터는 그린이 누렇게 변하죠. 그렇기 때문에 2~3개월 전부터 적응 단계를 거쳐야 돼요. 지형에 따라 누르는 적정 압력도 다르고요.”
주관 단체 성격 따라 코스 셋업 확 바뀌기도
코스 셋업을 위해서는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각종 길이를 재는 줄자, 선을 긋는 여러 색의 페인트, 그린의 빠르기를 측정하는 스팀프미터, 그린의 단단함을 측정하는 경도계, 기울기를 보는 경사측정기구, 먼 거리를 재기 위한 거리측정기 등이다.
가장 중요한 도구는 뭘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구글맵이요.” 왜 그럴까. “코스 지형을 미리 프린트해서 봐야 돼요. 구글맵에는 수평 거리 외에도 고도까지 다 나오거든요. 이걸 보면서 코스 구역을 어디까지 설정할 건지, 랜딩 존은 어떻게 할지 개략적으로 파악하는 거죠.”
국내 코스 셋업의 트렌드 중 하나는 과거에 비해 아웃오브바운즈(OB) 구역을 확 줄였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코스에 OB구역을 표시하는 흰 말뚝이 곳곳에 박혀 있었지만 지금은 외곽에만 설정하는 추세다. OB 구역이나 페널티 구역 등 각종 선도 그냥 긋는 건 아니다. “경사가 심한 곳에 페널티 구역 선을 그으면 드롭을 할 때 볼이 멈추지 않아 구제 절차 시간이 오래 걸려요. 움직일 수 없는 인공 장해물과 인접한 곳에 선을 그으면 구제 절차가 두 번 이어질 수도 있고요. 이런 것들은 플레이 속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전에 충분히 시뮬레이션을 해봐야 해요.”
대회를 주관하는 단체에 따라서도 코스 셋업은 조금씩 달라진다. 선수 단체(국내는 KPGA와 KLPGA 투어, 해외는 PGA와 LPGA 투어 등)가 주관하는 대회는 아무래도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주려 한다. 코스가 비정상 상태일 때 볼을 집어 올려 닦은 뒤 칠 수 있는 ‘프리퍼드 라이’도 많이 적용한다. 이에 비해 국내의 KGA나 영국의 R&A, 미국의 USGA 등은 가급적 ‘볼을 있는 그대로 친다’는 규칙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구 차장은 “코스 셋업을 위해서는 규칙뿐만 아니라 코스 설계, 잔디, 토양, 날씨 등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골프 실력도 어느 정도 뒷받침돼야 한다”며 “이렇듯 복잡하고 전문적이기 때문에 코스 셋업을 룰과 관계된 업무의 최고봉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 좋은 코스 셋업의 5가지 조건
1. 잘 친 샷과 실수한 샷에 대한 변별력이 있어야 한다.
2. 스코어가 바운스 등 운에 좌우돼선 안 된다.
3. 실수 뒤의 리커버리 능력도 테스트할 수 있어야 한다.
4. 14개의 클럽을 모두 사용하도록 거리가 다양해야 한다.
5. 다양한 공략 루트가 있어 성공에는 보상, 실패에는 벌이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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