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人터뷰] 부활한 '피겨 장군' 김예림 "다음 세계선수권에서는 최고치 기량 보여주고 싶어요"
[스포티비뉴스=태릉, 조영준 기자] "이번 시즌을 돌이켜보면 좋은 순간이 정말 많았던 거 같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가 얼마나 아쉬웠는지는 알지만 자꾸 그 대회 하나로 제가 열심히 달려온 것을 깎아내리지는 말자고 생각했죠."
'피겨 장군' 김예림(20, 단국대)의 2022~2023 시즌은 파란만장했다. 여자 싱글 선수로는 적지 않은 스무 살의 나이에 '역대급 시즌'을 보냈지만 단 한 개 대회로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는 듯 보였다.
지난 시즌 김예림은 총 9개의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시즌 내내 세계 곳곳을 누비며 거머쥔 메달 수는 무려 7개(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였다. 한국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사상 단일 시즌 국제 대회 최다 메달이었다.
그러나 가장 빛났어야 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불운의 그림자가 엄습했다. 시즌 내내 김예림을 괴롭힌 허리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18위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다.
숨 쉴 틈 없이 걸어온 발걸음은 힘없이 풀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다른 시즌과 비교해 종착역은 아직 남아 있었다. 한국 피겨는 처음으로 국가 대항단체전인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 팀 트로피에 출전했다. 당당하게 한국 대표로 빙판에 선 '피겨 장군'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스포티비뉴스는 차기 시즌 준비 중인 김예림을 서울 노원구 태릉실내아이스링크에서 만났다. 월드 팀 트로피 은메달로 한결 표정이 밝아진 김예림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빙판을 질주했다.
월드 팀 트로피를 마친 김예림은 지난달 24일 대회가 열린 일본에서 귀국했다. 그다음 날 병원에서 곧바로 부상 중인 허리 검사를 받은 뒤 입원했고 시술을 받았다. 27일 퇴원한 그는 아직 몸 상태를 고려해 점프는 시도하지 않았다.
처음 출전한 월드 팀 트로피는 김예림의 '부활 무대'였다. 지난달 14일 열린 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그는 시즌 베스트이자 개인 최고 점수인 143.59점을 받았다. 세계선수권대회의 부진 이후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경기를 마치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세계선수권대회 이후 충격이 컸고 정말 속상하고 힘들었어요. 그래서 팀 트로피 준비 과정도 쉽지 않았죠. 하지만 다른 선수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고 대회를 포기할 마음도 없었죠.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었습니다."
세계선수권대회 응원 차 대회가 열린 일본 사이타마를 방문한 남자 싱글 대표 이시형(23, 고려대)과 경재석(23)은 김예림의 처진 어깨에 힘을 불어넣었다.
"오히려 (오빠들은) 대회나 경기 얘기는 굳이 안 했어요. 일상적인 얘기와 재미있는 개그로 제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노력했죠"
이시형, 경재석과 가볍게 일본 여행을 마친 뒤 귀국한 김예림은 월드 팀 트로피에서 명예 회복을 노렸다. 그리고 이번 시즌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해내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진천선수촌 합숙 훈련으로 한층 가까워진 팀 코리아의 팀 워크, 월드 팀 트로피에서 찬란하게 빛나다
'피겨 장군'이란 별명답게 털털한 성격을 지닌 김예림은 남자 싱글 선수들과의 친분이 두텁다. 무남독녀 외동으로 자란 김예림에게 "저런 오빠들이 있었으면 좋지 않겠느냐?"라고 질문하자 그는 "재미있었을 것"이라며 웃으며 답했다.
"제가 성격이 털털한 점도 있고 오빠들 앞에서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웃음) 국가대표 동료들과는 그전에도 정말 친했지만 그 이상을 넘은 건 진천선수촌 합숙 계기가 컸어요.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운동할 때와 밥 먹을 때 개인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못 봤던 모습도 봤고 가족처럼 가까워졌죠."
월드 팀 트로피에서 팀 코리아는 다양한 응원으로 동료들을 응원했다. 진심으로 친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김예림은 지난 시즌 최고 성적을 거둔 것은 물론 한층 가까워진 '동료애'도 얻었다.
그동안 피겨 선수들은 자신들이 여가를 보낼 '놀이 문화'가 부족했다. 그러나 탁구에 재미를 붙이면서 이들의 사이는 한층 돈독해졌다. 자신의 탁구 실력을 묻자 김예림은 "제가 가장 잘한다"며 웃었다.
"(차)준환이 오빠가 본인과 제가 가장 잘한다고 했는데 사실, 준환이 오빠는 저를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웃음) 다들 재미가 들려서 매일 훈련이 끝나면 탁구를 쳤는데 다른 종목 선수들과 친해진 계기도 됐죠."
산고 끝에 탄생한 걸작 '42년의 여름'은 인생 프로그램
피겨 스케이터가 자신의 모든 것을 증명하는 것은 프로그램이다. 기술요소(TES) 점수와 프로그램 구성요소(PCS) 점수를 합해 완성된 프로그램은 단순한 기술의 향연이 아닌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어린 시절 김예림은 또래 경쟁자들과 비교해 '표현력'에서 가장 열세를 보였다. 2019~2020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시니어 무대에서 활동한 그는 어느덧 네 번째 시니어 시즌을 보냈다.
굵직한 국제 대회에 출전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 경험치는 어느덧 열매를 맺었다. 특히 2022~2023 시즌 무수히 많은 무대에서 연기한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 영화 '42년의 여름' OST는 그의 피겨 인생에 이정표가 됐다.
이 프로그램은 다양한 점프와 기술 요소 사이의 여백을 빼곡하게 채워주는 안무가 일품이다. 특히 김예림은 시니어 선수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손끝 연기 및 스트로킹과 트위즐을 선보이며 프로그램 완성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지난 시즌 프로그램을 만들 때 쇼트프로그램(Mercy)은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프리스케이팅은 좀 문제가 있었어요. 처음 편곡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무가인 데이비드 윌슨(캐나다)과 많이 고심했죠. 결국 자작곡을 요청해서 편곡해 보기로 했는데 그게 최종 버전이 됐습니다. 많은 고민과 우여곡절 끝에 탄생했죠. 정성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제 인생 프로그램이 됐고 마지막 경기(월드 팀 트로피 프리스케이팅)에서 복받친 감정으로 마무리해서 두고두고 남을 거 같습니다."
데이비드 윌슨 안무가가 완성한 '42년의 여름'은 시즌 도중 작곡가 칼 휴고가 새롭게 만든 곡으로 재편곡됐다. 산고 끝에 태어난 이 작품은 김예림 부활에 날갯짓을 달았다.
2023~2024 시즌 그의 프로그램 안무는 제프리 버틀(캐나다, 쇼트)과 윌슨이 책임진다. 지난 시즌 남자 싱글의 차준환을 비롯한 적지 않은 선수들은 대중적인 팝송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새로운 변신을 시도해 보고 싶지 않냐는 질문에 김예림은 "아직 경기에서는 그런 곡을 할 자신은 없고 갈라에서는 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저는 서정적이고 클래식한 음악이 잘 어울려서 아직 큰 변화를 줄 생각은 없다"고 덧붙였다.
한국 피겨 역사에 '김예림 최초'도 새롭게 생겨…스무 살 넘었지만 열정은 식지 않아
그동안 한국 피겨 스케이팅 역사를 논할 때 김연아(33)의 존재감은 매우 컸다. 모든 길을 개척한 김연아의 발자취는 그에게 영향을 받은 선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연아는 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을 끝으로 공식 대회를 떠났다. 그리고 그해 봄 열린 아이스쇼에서 공식적으로 은퇴를 발표했다.
어느덧 김연아가 빙판을 떠난 지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많은 후배들은 국제 무대에 도전했고 메달 수는 조금씩 늘어났다. 그리고 2022~2023 시즌 국제 대회에서 무려 7개의 메달을 휩쓴 선수가 등장했다. 김예림은 한국 피겨 사상 단일 시즌 국제 대회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목에 건 시니어 여자 싱글 선수가 됐다.(김연아 : 2008~2009 시즌, 2009~2010 시즌 각각 국제 대회 메달 5개, 유영 : 2019~2020 시즌 국제 대회 메달 5개)
또한 ISU 공인 챌린저 대회 2연속 우승과 그랑프리 NHK트로피 우승은 남여 싱글 통틀어 김예림이 최초였다. 여기에 동계세계대학경기대회(U대회)에서는 여자 싱글 사상 처음으로 시상대(동메달)에 올랐다.
이러한 업적은 세계선수권대회의 부진으로 지워지기엔 아까웠다. 김예림은 "이번 시즌을 돌이켜보면 좋은 순간이 정말 많았다. 세계선수권대회는 여전히 큰 아쉬움으로 다가오지만 이 대회 하나로 열심히 달려온 것을 깎아내리지 말자고 생각했다"며 씩씩하게 말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최고의 시즌을 힘을 보낸 김예림의 원동력은 '긍정의 힘'이었다. 170cm인 키는 부상 유발 및 점프 퀄리티를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긍정적으로 활용하기로 결심했고 긴팔에서 나오는 손동작과 스케일이 큰 점프 및 움직임으로 자신의 장점을 살리려고 노력했다.
시즌이 지날수록 어려운 점프 구성을 들고나오는 선수들과의 경쟁력도 김예림의 과제 가운데 하나다. 비록 4회전 점프나 트리플 악셀 같은 고난도 점프는 없지만 현재 그가 시도하는 기술 구성은 시니어 정상급 선수들과 비교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김예림은 "(기술 구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시도할 생각이다. 작년에도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더블 악셀 시퀀스를 프로그램 후반에 넣었다. 이번에도 더 발전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아직 어떤 방법으로 기술 구성을 높일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어느새 대표팀 맏언니가 된 김예림은 "책임감도 있지만 조금은 외로운 싸움이 느껴질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경험한 그의 시선은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을 향해 있다. 피겨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꺾일 법한 시기도 있을 듯 보였다. 그러나 김예림은 "어린 시절과 비교하면 오히려 피겨가 더 좋아졌다"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앞으로를 생각할 때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계속 스케이트를 타는 것이) 당연한 시선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음 시즌에는 마지막 두 챔피언십 대회(4대륙선수권대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제 최고치의 기량을 펼치고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이 목표입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피겨에 대한 열정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종목을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졌어요. 신기한 점은 (연습과 경기는) 정말 힘든데 시간이 흐를수록 스케이트에 대한 애정은 더 커지는 점이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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