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소비 분위기 바뀐다…‘스텔스 럭셔리’가 뭐길래
한동안 명품 시장에는 빅 로고가 유행했다. 딱 보면 알수 있는…. 물론 빅 로고가 아니어도 명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로고가 잘 보이는 곳에 붙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스텔스 럭셔리(조용한 명품)’로 불리는 로고리스(상표가 보이지 않는)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겉으로 볼 때 어떤 브랜드인지 알 수 없어야 ‘진짜 명품’이라는 말도 나온다.
로고리스 명품은 201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고급스럽다는 이유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 구찌의 ‘GG’ 로고 플레이 전략 등이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자 빅 로고의 시대가 열렸다. 소비자들의 선택 기준에 변화가 생겼고 로고리스 명품의 인기는 사그라들었다.
올해 다시 스텔스 럭셔리가 뜨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경제 불확실성이 심화하면서 바뀐 사회 분위기가 명품 구매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회 분위기 달라져…명품 소비도 ‘조용하게’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4월 14일(현지 시간) ‘스텔스 럭셔리가 주목받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비싼 가격에 로고가 없는 패션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불안정한 경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관심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현상을 ‘은밀한 부’ 또는 ‘조용한 사치’라고 칭했다.
스텔스 럭셔리는 상표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의류 안감을 보거나 가방을 열기 전까지는 어떤 브랜드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로고를 앞세워 제품의 가치를 나타내지 않고 높은 가격대와 고급 소재를 사용하는 것으로 가치를 표현한다.
매체는 할리우드의 유명 네포 베이비(유명한 부모 덕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 이른바 ‘금수저’)인 배우 기네스 펠트로의 법정 패션을 스텔스 럭셔리의 예시로 들었다.
펠트로는 2016년 70대 남성과 충돌한 스키 사고로 민사 소송을 당해 최근까지 미국 유타 주 파크시티 지방법원에 출두했다. 이때 로고가 보이지 않는 평범한 옷을 입었다. 심플한 디자인에 색이 튀지 않는 평범한 스웨터와 부츠 등이었다. 브랜드는 프라다와 셀린느로 알려졌다. 프라다는 이탈리아, 셀린느는 프랑스 명품이다.
명품 컨설턴트 로버트 버크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제품의 브랜드를) 알고 있다는 것이 핵심”이라며 “누군가는 그들이 무엇을 입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백화점 니만 마커스의 명품사업부 부사장인 조디 칸은 “로에베·생로랑·미우미우처럼 평소 화려했던 브랜드들이 이번 시즌에는 클래식한 디자인을 내놓고 있다”며 “이런 변화가 스텔스 럭셔리가 뜨는 분위기를 굳히고 있다”고 말했다.
스텔스 럭셔리가 관심을 받는 것은 달라진 사회적 분위기 영향이다. 버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경제 불확실성에 대한 피로감이 생겼다”며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기간에는 경기 부양책과 풍부한 유동성으로 젊은 구매자들이 로고가 크게 박힌 명품을 선호했지만 지금은 ‘굳이’ 돈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브랜드 컨설팅 업체 럭셔리인스티튜트의 마틴 페드라자 최고경영자(CEO)는 스텔스 럭셔리가 ‘모방’에서 시작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대중이 부자들을 모방하듯이 부자도 대중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스텔스 럭셔리가 그 노력의 일환이라는 주장이다.
페드라자 CEO에 따르면 도나 카란과 미우치아 프라다가 미니멀리즘의 실용적인 복장을 유행시킨 1990년대, 세계 금융 위기였던 2008~2009년에도 은밀하게 부를 과시하기 위해 스텔스 럭셔리가 관심을 받았다.
스텔스 럭셔리 뭐길래…로로피아나부터 아워레가시까지
스텔스 패션의 특징은 ‘튀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두운 색감을 사용하거나 연한 황갈색(베이지) 또는 흰색 등 무채색에 가깝다. 밝은 색을 사용할 때는 과도하게 여러 색을 쓰지 않고 한두 가지 색으로만 통일한다. 여기에 디자인은 단순해야 한다. 고가의 제품이라고 해도 반짝이는 장신구가 과하게 들어가 있는 것은 스텔스 패션이 아니라는 의미다.
스텔스 럭셔리로 불리기 위한 조건도 까다롭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스텔스 럭셔리는 역사도 있어야 하고 품질도 좋아야 한다”며 “소비자들이 비싼 돈을 주고 살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스텔스 럭셔리는 일반 명품보다 더 많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스텔스 럭셔리는 1924년 설립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로로피아나’다.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2013년 지분 80%를 인수하며 로로피아나의 경영권을 확보한 명품 중의 명품이다.
지난해 초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크림 반도 합병 축가 무대에 로로피아나 패딩 재킷을 입고 나왔다. 제품의 가격대는 1600만원에 달하지만 로고는 물론 브랜드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디자인도 없다. 지난해 말에도 400만원 이상의 남색 로로피아나 패딩을 입고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2014년 ‘땅콩 회항’ 논란 당시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착용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양복으로 알려지면서 관심을 받았다.
로로피아나가 로고 없이도 고가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이유는 ‘원단’에 있다. 로로피아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원단으로 꼽히는 낙타과 동물 ‘비쿠냐’의 털을 사용한다. 상품성이 높아 ‘신이 내린 원단’ 또는 ‘신의 섬유’라고도 불린다. 이 밖에 최고급 품질의 캐시미어와 양모를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837년 설립된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도 스텔스 럭셔리에 해당한다. 승마 용품 판매를 시작으로 패션 사업에 뛰어든 에르메스는 최상급의 가죽 제품을 만들어 내며 유명세를 얻었다. 고품질의 제품이 브랜드의 강점으로 자리 잡은 뒤 과도한 로고 플레이 대신 작은 크기의 ‘H 로고’만 사용한다.
에르메스의 특징은 ‘폐쇄적인 판매 전략’이다. 가방 하나에 1000만원이 넘지만 일부 가방은 신규 고객에게 팔지 않는다. 또한 프랑스 파리에 있는 본점은 예약 없이 방문하기 어렵고 매장에 갈 때도 옷 차림새를 신경 써야 한다.
1910년 설립된 이탈리아 남성 명품 브랜드 ‘에르메네질도 제냐’도 있다. 고급 남성 정장으로 유명하고 로고 없이 프리미엄 울·캐시미어·리넨·메리노·실크 등 최고급 원단을 선별해 사용하는 것으로 브랜드 가치를 입증한다.
1829년 설립된 벨기에 명품 브랜드 ‘델보’는 프리미엄급 패션 회사 가운데 가죽 제품을 가장 먼저 만든 곳이다. 델보가 로고 플레이 없이도 유명해진 데는 벨기에 왕실의 선택이 있었다. 1883년 벨기에 왕궁 공식 납품 업체로 선정돼 왕실 조달 허가증을 받았다. 1956년에는 델보의 ‘몽 그랜드 보뇌르’ 가방이 벨기에 국왕인 알버트 2세와 파올라 왕비의 결혼 선물로 선정됐고 1980년대 들어서는 파올라 왕비가 델보 매장을 방문해 생산 과정을 직접 보기도 했다. 현 왕비인 마틸드 왕비도 델보의 가방을 사용하고 있다.
이 밖에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발렉스트라·헨리베글린·보테가베네타·브루넬로 쿠치넬리, 프랑스 브랜드 르메르, 스웨던 브랜드 아워레가시, 독일 브랜드 질샌더 등이 로고를 부각하지 않는 ‘스텔스 럭셔리’에 해당한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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