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있으나 마나 한 선행학습규제법

오창민 기자 2023. 5.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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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이오와에서는 5분 이상 키스하는 것이 불법이고, 플로리다에서는 수영복 차림으로 대중 앞에서 노래하면 안 된다. 캔자스에서는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면 처벌된다. 인터넷에 떠도는 미국의 ‘웃기는 법’ 사례들이다. 외국인이 보기에는 이보다 더 황당한 규제가 한국에 있다. 중학교 2학년 학생이 학교에서 3학년 공부를 하면 위법이 될 수 있다. 한 자릿수 덧셈을 가르치도록 교육과정이 편성된 초등 1학년 학생에게, 교사가 2학년 과정인 구구단을 지도해도 안 된다. 이른바 ‘선행학습규제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오창민 논설위원

정식 이름이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인 이 법은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3월 제정됐다. 대선 TV토론에서 박근혜 후보가 과도한 경쟁을 유발하고 사교육비 부담을 키우는 선행학습을 금지하겠다고 공약한 것이 특별법 입안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실효성 논란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법을 중요하고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고, 법을 어겨도 실제로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법은 공교육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선행학습과 선행교육을 규제하고 학생의 건강한 심신 발달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초·중·고교의 정규 교육과정과 방과후학교 수업에서 선행교육을 금지하고, 학교 시험은 물론이고 고입·대입 고사에서 선행학습을 해야 풀 수 있는 문제를 못 내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구체적으로 학교장은 학교에서 선행교육을 않도록 지도·감독하고, 학부모·학생·교사에게 선행학습을 예방하기 위한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제5조). 교사는 학생들이 사전에 학원에서 배웠을 것으로 전제하고 수업을 하면 안 된다(제5조의2). 학부모는 자녀가 학교의 교육과정에 따른 학교 수업 및 각종 활동에 성실히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학교의 정책에 협조하여야 한다(제6조). 교사는 학생이 선행학습으로 학교 수업에 영향이 있거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 학부모 등에게 필요한 교육적 조언이나 상담을 할 수 있다(제7조).

그런데 정작 선행학습 공급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교육업체는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사교육 종사자들의 기본권과 학부모의 교육권 침해로 위헌 시비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선행학습을 유발하는 광고나 선전을 금지하는 규정(제8조의4)을 뒀다. 이를 근거로 학원을 단속할 수는 있지만 선행학습 유발 광고에 대한 정의와 처벌 기준은 없다. 아파트 게시판에 붙어 있는 ‘과학고 대비 초6 특설반’ ‘1년에 미·적분 완성’ 같은 학원 광고 전단은 이 법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교육당국으로서는 교습비나 강사 자격 점검 등을 핑계로 학원들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는 게 전부다.

이 법에 명시된 고입 전형 평가도 실속이 없다. 자립형사립고·외국어고·과학고는 입학시험이 선행학습을 유발하는지 자체 영향평가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교육청에 제출해야 한다. 교육청은 평가 결과를 분석한 뒤 문제가 발견되면 해당 학교에 행·재정 처분을 내린다. 최근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낸 자료를 보면 지난 3년간 전국 자사고·외고·과학고 등이 시행한 240여건의 입학 전형 평가에서 사교육 유발 요인이 적발된 사례는 1건에 불과했다. 정부의 사교육비 통계에 의하면 자사고·외고·과학고 진학 희망자는 일반고 진학 희망자보다 사교육비 지출이 50% 이상 많다. 그런데 자사고와 외고 입시는 선행학습 유발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결론났으니 제도에 허점이 있거나 교육청의 관리·감독이 요식행위에 그쳤다고밖에 볼 수 없다. 교육당국이 자사고와 외고 입시에 오히려 면죄부만 준 꼴이다.

선행학습규제법 시행에도 선행학습과 사교육은 전혀 줄지 않고 있다. 서울 강남은 물론이고 지방 학원에서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의대 진학반’이 성행한다. 교사들조차 자녀를 학원에 보내 선행학습을 시킨다. 학생수 감소에도 지난해 사교육비는 전년보다 10.8% 증가한 26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선행학습도 못 잡고 사교육비 절감 효과도 없는데 교사와 교육청 직원들은 유명무실한 법을 유지하느라 ‘서류 작업’에 헛심을 쓰고 있다. 교육관료들은 그래도 법이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강변한다. 같은 논리라면 ‘불효자 규제 특별법’ ‘미혼 규제 및 저출생 극복 특별법’ 등도 만들어야 한다. 실효성 없이 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선행학습규제법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다. 고쳐쓸 수 없다면 폐지하는 게 옳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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