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 스스로 증명해야 할 때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의 시작은 외식사업이었다. 취약 계층 복지 현장에서 중장년 사업으로 인생 항로를 바꾼 계기 말이다. 30대 중반에 나는 자활사업을 하는 외식분야 기업에서 일했는데, 매출은 높았지만 영업이익은 늘 불안했다. 퇴직한 중장년 세대에서 전문 경영인을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퇴직자와 사회적 목적을 수행하는 기업을 연결하기 위해 17년 전 겁 없이 중장년 사업에 뛰어들었다.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중장년 사업이 시작된 때이다.
중장년 정책이 제도화되기 시작한 것도 어느덧 11년 전의 일이다. 2010년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중앙정부는 대응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고, 2012년부터 서울시가 지자체 최초로 중장년에 대한 정책 지원을 본격화했다. 이제 전국 87개 지자체에서 관련 조례를 제정할 정도로 중장년 세대 문제는 한국사회의 정책 의제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어느 정도 정책의 대중성은 확보한 셈이다. 물론 갈 길이 멀다.
가장 시급한 것은 정책 정당성의 확보다. “소외된 청년이 아니라 먹고살 만한 계층에게 왜 세금을 투입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중장년 세대가 사회에 기여해 중장년 정책이 꼭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해야 한다. 생활 의제를 발굴하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운동으로 사회를 바꾸는 힘을 보여주면 더 좋겠다. 중장년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에 공동으로 대응하고 법과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정치력도 필요하다.
지난해부터 현장에서는 변화가 감지된다. 마을, 지역 시민사회, 청년 세대 모임에서도 중장년 이슈가 중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공공 영역에서 일자리 문제 등에 집중한 것과 달리 새 주체들은 중장년의 갭이어, 기후 환경, 나이 듦, 세대 연계와 같은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둔다. 경기도가 중장년 세대를 위한 ‘기회 사다리’를 놓겠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중장년 정책을 시행해 주목받고 있고, 많은 지자체가 지역 위기를 해소할 동력으로 중장년 세대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정책에만 기대지 않고 중장년 세대 스스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시점인데, 중장년 세대 모임들 사이에서 연대의 논의를 시작한 것도 반갑다. 부족한 자원을 서로 보완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거시적인 이슈를 다룰 역량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전 세계에서 고령화 관련 논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시민사회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으로 시야를 넓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진행되고 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학력 수준, 자산 규모 등의 통계 자료를 근거로 중장년 세대는 인류가 맞이한 첫 번째 노년층이라고 얘기해 왔다. 힘없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역량과 경제력을 겸비한, 사회에 기여할 세대로서의 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통계에 기대지 않고도 중장년 세대의 잠재력을 증명해 내야 할 때인 것 같다. 다음 세대에게 무언가를 전수할 수 있는 세대,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세대임을 말이다. 한국사회가 공공 자원을 투입해 중장년 정책을 만들고, 중장년의 삶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할 때다.
남경아 사단법인 씨즈 중장년사업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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