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전세’라는 금융 부채의 적신호

박종세 논설위원 2023. 5. 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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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의 금융화’로 전셋값 요동
만기 못 맞춰 신뢰 잃으면 1000조 전세 시장 폭탄 될 수도
유동성 위기 대책 세워야
3일 법원 경매 전문기업 지지옥션에 따르면 지난 4월 서울 빌라(다세대·연립) 경매 진행 건수 820건 중 71건이 낙찰됐다. 낙찰률은 8.70%로, 지지옥션이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1년 1월 이래 가장 낮았다.사진은 3일 서울 강서구의 한 빌라 밀집지역. 2023.5.3/뉴스1

현재 한국 경제의 ‘회색 코뿔소’는 전세 보증금이다. 땅을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코뿔소는 모두 알 수 있지만 어느새 곁에 오면 대비할 수 없다. 한국의 전세 보증금이 그렇다. 반복적인 위기 징후를 보이는데 사회 전체적으로 무방비 상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우리는 전세 보증금이 2년마다 만기가 돌아오며, 반드시 갚아야 하는 금융 부채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고 있다. 그동안 기존 세입자에게 돌려줄 전세금은 새로운 세입자에게 받아 해결해 왔다. 사실상 집주인의 리스크는 없었다. 집값이 추세적으로 올랐을 뿐만 아니라, 집값이 약세인 경우에는 전세 수요가 높고, 반대인 경우에는 전셋값이 떨어져 서로 보완해 주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금리가 빠르게 오르면서 집값과 전셋값이 동반 폭락했다. 작년 서울 아파트 매매가는 22% 하락했고, 전세가 하락률도 15%에 달했다. 외환 위기 당시 나라 전체의 부와 소득이 내려앉았을 때 목격했던 현상이 엄청난 외부적 쇼크가 없는데도 일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전세의 금융화’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과거에는 자기가 돈을 모은 범위 내에서 전세를 구했다면, 근래에는 저금리 전세 대출로 추가로 빚을 내 전셋집을 얻는다. 빚으로 더욱 새 집, 큰 집으로 옮기는 전세 과소비도 발생했다. 2012년 23조원 수준이었던 전세 자금 대출은 2021년 180조원까지 급증했다. 그러다 금리가 치솟자, 집값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전세의 다운사이징과 월세 전환으로 전셋값도 급락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집을 팔아도 전세금을 내줄 수 없는 ‘깡통 전세’와 새로 세입자를 구해도 추가로 돈을 보태야만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는 ‘역전세’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전셋값은 과거에도 재건축 단지의 입주 등과 맞물려 수요·공급이 어긋나면 국지적으로 요동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가격이 오르내리고 전국적 현상으로 퍼지지는 않았다. 지난 2020년 문재인 정부 시절 졸속 통과시킨 임대차 3법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서울에선 전셋집 하나를 보려고 9팀이 줄을 서는 극단적 전세 품귀가 일어났고, 임대인은 4년 치 인상분을 한꺼번에 올려 받았다. 임대차법 시행 후 1년 동안 전셋값은 전국 24.6%, 서울 27.2%나 올랐다. 전셋값이 치솟아 매매가에 달라붙자 무자본 갭투자가 대유행했다. 2021년엔 매월 3만건 넘는 집이 전세를 끼고 매입됐다. 국토연구원은 이런 식으로 매입한 주택 10채 중 3채가 보증금을 떼일 수 있는 위험 주택이라고 보고 있다.

전세 사기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잠재해 있는 전세 부실과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올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임대차 3법 이후 높게 올려 받았던 전세 만기가 대거 돌아온다. 집값과 전셋값 동반 하락이 계속되면 전세 보증금 미반환 사태가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은행도 만기가 돌아온 자금을 상환하지 못해 신뢰를 잃으면 ‘뱅크런(bank run)’이 일어나 파산한다. 전세 제도가 신뢰를 잃어 ‘전세런’ 비슷한 것이라도 일어나면 1000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되는 전세 보증금은 우리 경제와 사회를 뒤흔드는 뇌관이 될 수 있다. 전세 보증금 반환 용도 주택담보대출에 대해선 한시적이라도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를 풀고, 전세보증보험 한도 축소 조치 유예도 검토해 봐야 한다. 금융회사의 건전성 문제보다 전세 자금줄이 막혀 신용 경색을 일으키는 유동성 위기가 먼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2년마다 금융 충격을 일으킬 수 있는 전세 제도를 어떻게 대체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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