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그 손 안에 한번도 없었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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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는 '인물사'라는 장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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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이 어떤 식으로든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올라타지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시대를 웅변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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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는 ‘인물사’라는 장르가 있다. 특정 인물로 그 시대의 역사상을 복원해내는 것이 목표다. 이제는 너무 촌스럽게 느껴지지만 한때 수많은 인물평전에 관행적으로 붙던 “○○와 그의 시대”라는 제목은 인물사의 주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스승 정두희가 남긴 미완의 유작을 제자 계승범이 완성한 <유자광,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도 얼핏 그런 인물사의 전형처럼 느껴진다. 한데 좀 이상하다. 희대의 간신 유자광이 과연 시대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던가? 유자광은 당대의 지배적 흐름을 보여주지도, 이에 맞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주도하지도 않았다. 하다못해 다음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서야 하는 ‘반동인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두희가 2000년에 펴낸 <조광조>에 이어 <유자광>을 기획하고, 계승범이 스승에게 넘겨받은 원고를 10년 만에 완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두 지은이의 대답은 다소 역설적이다. 유자광이 어떤 식으로든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올라타지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시대를 웅변한다는 것이다. 유자광은 서얼, 구체적으로는 양반 남성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얼자)이었다. 적서 차별이 본격화하던 당시 서얼 유자광이 출세할 ‘정상적’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세조 말 함경도를 뒤흔든 이시애의 난이라는 ‘비상한’ 기회를 이용해 왕의 총애를 얻었지만, 서얼이란 ‘주홍글씨’는 사라지기는커녕 더욱 진해졌다. 심지어 그 아비 유구조차 비천한 아들의 공로로 벼슬 받기를 거부했다.
가족마저 외면한 유자광이 살아남을 방법은, 따라서 오로지 왕의 “해와 달 같은 밝으심”에 기대는 길뿐이었다. 누구보다 먼저 왕의 뜻을 성취함으로써 자기 입지를 공고히 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야말로 그의 생존전략이었다. 천하의 한명회를 탄핵한 것도, 무오사화의 바람잡이 구실을 한 것도 왕의 의중을 미리 읽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유자광의 충성은 왕 개인에게 향했을 뿐, 군주권 강화나 친위대 양성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 점에서 유자광은 ‘왕의 남자’였을지언정 ‘왕당파(派)’는 아니었다.
그마저도 중종반정 이후 사림의 공론(公論)이 대세로 떠오르며 유자광은 왕의 호의조차 기대할 수 없는 처지로 추락한다. 그는 유배지에서 죽었고, 이후 간신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실제로는 유자광이 앞장서지도, 화를 입은 사람이 많지도 않았건만 사림이 무수히 죽어나간 사화의 설계자이자 주동자로 박제돼 오늘날까지 세간의 비난을 받는다.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내 손안에 있소이다”라는 유명한 대사와 달리, 세상은 단 한 번도 유자광의 손안에 있었던 적이 없다.
계승범은 에필로그에서 유자광이야말로 조선이 ‘이상한’ 유교국가였다는 증거가 아니었겠느냐 반문한다. 이상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었으면서도 실제로는 유자광 같은 이들을 차별하고 멸시해온 모순성일까? 하지만 바로 그 모순성 덕에 조선왕조가 그토록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었다면? 제자 계승범이 ‘사림운동’이란 표현으로 설명했듯 중종 대에 이르면 주자학의 가치는 대부분의 사대부에게 마땅히 추구해야 할, 숭고한 이상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조선정치사를 특징짓는 우아하고 세련된 논쟁, 전근대 국가로는 놀라울 정도로 활발하던 정치참여도 이로써 가능했다.
하지만 스승 정두희의 선구적인 연구가 증명하듯, ‘공론’의 대변자를 자임하던 이들 사대부는 지극히 동질적인 집단이었다. 학연과 지연, 혈연으로 복잡하게 얽힌 이들의 네트워크야말로 ‘공론정치’를 떠받친 밑바탕이었다. 서얼 출신 유자광이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공론’은 구성원의 동질성을 전제할 때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불편한 진실 때문일지 모른다.
유찬근 대학원생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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