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11의 목소리] 폐지 주워서 받는 돈 소소하지만, 내가 벌어서 쓰는 것이니…

한겨레 2023. 5. 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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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1의 목소리]폐지 줍는 일은 4년 전부터 시작했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고 할 수 있겠다 싶어 시작했어. 누구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지도 않고 그냥 시작했지. 폐지를 모아서 고물상에 가져가니 받아주더라구. (…) 많을 때는 40~45㎏ 정도, 보통은 30~35㎏ 정도 고물상에 가져갔어. 종일 쉴 새 없이 주우러 다니면 그 정도야. (…) 요즘은 근처 사는 동네 사람들이 허리 구부러진 노인네가 폐지 줍는다고 도와줘.
지난 1월10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한 노인이 폐지를 담은 수레를 끌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조희순 | 서울시 성북구, 폐지 수집

나는 1941년 일본 동경(도쿄)에서 태어났고 해방 뒤에 부모님과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해. 난 그 기억이 없지만. 돌아와서는 부모님 고향인 경상북도 경주에서 언니 둘, 오빠 둘, 나, 남동생까지 6남매가 부모님과 함께 살았지.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들어갔는데 몸이 약해서 학교만 가면 쓰러지는 거야. 무슨 병인지 알지도 못하고 계속 아파서 2학년도 마치지 못하고 그만뒀지. 그래서 내 이름자나 알지 한글을 읽고 쓰질 못해.

집에 드러누워만 있었는데 동네 교회 전도사가 집에 와서 교회를 다니면 나을 거라고 하는 거야. 그렇게 교회를 다닌 뒤로 건강하게 살게 됐지. 나이가 차도록 교회만 다녔고 결혼 생각도 없었고 전도사를 하고 싶었어. 스물세살인가 (교회 사람들이 모인) 〇〇공동체에 들어갔어. 근데 나처럼 배운 게 없는 사람들은 노동일밖에 할 게 없더라고. 벽돌 찍는 데서도 일하고 벽돌을 지고도 다녔지. 거기서 3~4년을 지내다 나오게 돼 서울로 올라왔어. 친구 따라 식모살이를 몇달 했는데 잘 안돼서 결국 집으로 내려와 버렸지. 그게 스물일곱 살인가 그래.

경주 집으로 내려와 2년 정도 교회만 다니다가 아는 전도사가 중매를 서 강원도 사람이랑 스물아홉에 결혼했어. 남편 고향인 강원도 평창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지. 근데 그 집에 가보니 시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조모와 손자 넷이 사는 집의 큰 손자가 남편이더라고. 나까지 여섯 식구가 산비탈 다랑논에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데,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남편이 공사장에서 노가다(막일)를 했지. 그래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아래 시동생을 장가보낸 뒤에 평창 집을 맡기고 나랑 남편 그리고 아들딸까지 네 식구가 서울로 올라왔어. 남편이 국제상사의 경비를 했는데, 6개월 정도 했나, 갑자기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어. 그게 내 나이 서른여섯일 때야.

아이 둘 데리고 살려고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었어. 근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라고. 시동생이 강원도 철원에서 여관을 했는데 그 여관허가증을 내 명의로 냈었거든. 시동생이 여관을 맡아달라고 해서 철원에 갔는데, 맡아달라는 건 말뿐이고 거의 식모처럼 부리더라고. 몇년 하다가 서울로 돌아와 아들이랑 같이 살면서 장가를 보냈는데 며느리가 자꾸 카드를 쓰게 하는 거야. 나랑 아들까지 신용불량자로 만들어놓고는 도망갔어.

그 뒤 아들은 손녀랑 따로 살았지. 나는 서울 논현동에 있던 쌈밥집에서 주방일을 했어. 3년 정도 했는데 내가 신용불량자라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월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 나중에 그게 문제가 돼 그만뒀어. 그래도 그때 모은 돈으로 딸 시집가는데 좀 보태고 집 보증금 마련했지. 근데 쌈밥집에서 야채를 씻는데 허리가 너무 아픈 거야. 그때부터 허리가 구부러지기 시작했어. 식당일을 그만두고 파출부 생활을 하던 땐데 살던 빌라에서 유리창을 닦다가 2층에서 떨어졌어. 병원에서는 부러진 데가 없다고 해서 물리치료만 받고 나왔는데, 그 뒤로 허리가 계속 아프더니 점점 더 구부러지데.

폐지 줍는 일은 4년 전부터 시작했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고 할 수 있겠다 싶어 시작했어. 누구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지도 않고 그냥 시작했지. 폐지를 모아서 고물상에 가져가니 받아주더라구. 그때는 파지값이 그래도 괜찮아서 2천~3천원 받았어. 요즘은 파지값이 내려가 같은 양을 가져가도 천원 정도나 받아. 많을 때는 40~45㎏ 정도, 보통은 30~35㎏ 정도 고물상에 가져갔어. 종일 쉴 새 없이 주우러 다니면 그 정도야.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온 뒤로는 힘들어서 자주 나가지 못해. 요즘은 근처 사는 동네 사람들이 허리 구부러진 노인네가 폐지 줍는다고 도와줘. 사람들이 폐지를 가져오면 모아뒀다가 내가 주운 것까지 합해서 고물상에 가져가. 그러니 2~3일에 한번 정도 가게 되더라고. 폐지값은 ㎏당 50원이야. 나라에서 주는 기초노령연금 30만원에 5년 전부터 기초생활수급자가 돼 받는 13~14만원, 거기에 폐지 모은 돈까지 합해서 50만원 정도로 한달 살고 있어. 지난겨울에는 가스비가 20만원이 넘게 나왔는데 구청에서 지원해줘서 다행이었지.

내가 가진 게 없어서 아들, 딸을 대학도 보내지 못했어. 지금도 자식들 사는 게 힘든데 도와주지 못해 마음이 아파. 내 나이가 올해 여든넷이야.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은 폐지를 계속 주우려고 해. 운동도 되고 다른 할 일도 없으니까. 허리가 이렇게 구부러졌어도 아직도 걸어다닐 수 있는 게 감사하지. 폐지 주워서 받는 돈은 소소하지만 내가 벌어서 쓰는 것이니 정말 위안이 돼.

※정리: 강명효 <6411의 목소리> 편집자문위원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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