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존엄이라곤 없는’ 사교육
[왜냐면] 김은진 | 창원 도계중 1학년·아동인권활동가
“존엄이라곤 없는, 이미 더없이 폐허죠.” 학교폭력의 비극을 다룬 드라마 <더 글로리>의 극 중 대사다. 이 장면에서 시청자들은 학교폭력의 끔찍함을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우리 아동들이 처한 사교육의 덫을 떠올리게 했다. 학생으로서 현실에서 겪는 경험이 뇌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학원’이라 불리는 사교육은 이미 보편화해 있다. 많은 부모님이 압박을 느끼며 자녀의 학교 밖 교육을 지원한다. 그렇지만 자녀의 미래 영광을 위한 사교육이 존중받지 못하는 아동을 양산하고 있을 줄이야. 반전이다.
2022년 전교조에서 했던 ‘어린이 생활과 의견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 초등학교 4~6학년 학생 1841명 가운데 88.1%가 사교육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을 받지 않는 학생은 11.9%에 불과했다. 더 심각한 것은 사교육을 받은 아동 57.3%가 오후 6시 이후에 집으로 돌아간다고 답한 것이다. 6시는 어른들의 퇴근 시간이다. 아동의 쉴 권리가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동들은 입시 경쟁에 내몰려 사교육의 덫에 발을 내디디고 있다. 대치동 ‘초등 의대반’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니다.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어린이, 청소년에게 신체·심리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2016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 발표한 ‘아동 균형 생활지표’를 보면, 사교육 등 학교 밖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많은 학생은 성적은 높지만, 자아존중감이 떨어지고 스트레스와 공격성 지수, 우울감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셔틀버스를 타고 밤늦게까지 학원 트랙을 도는 탓에, 잠잘 시간이 부족하고 취미 활동은 엄두도 못 낸다. 친구와의 경쟁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유발한다.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던 한 친구는 학원을 마치고 숙제까지 끝내면 보통 자정이 넘는다며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다. 항상 지치고 불안하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고 하소연했다.
부모님과 학원 교육자는 학업 성취를 위해 아동에게 학업을 강요하거나 정서적 안정을 소홀히 하기도 한다. 학원에서 아동이 신체·정서적으로 학대당한 사례가 언론에 종종 보도된다. 올해 초 ‘미국식 홈스쿨링’을 내세운 입시학원의 운영자가 학생을 상습 폭행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교육을 명분 삼아 학생을 폭행한 것이다. 수업료는 3개월에 무려 4500만 원이었다.
비싼 학원 수업을 들을 여유가 없는 학생들은 부유한 가정의 또래와 경쟁할 수 없다. 학업 성취의 격차는 사회적 불평등의 영속, 빈부격차의 고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경제력의 차이가 유발한 아동 기본권의 차별이다.
이처럼 사교육이 아동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은 복잡하고 다면적 문제다. 아동에게 사교육을 지원하면 학업 성취에는 확실히 이점이 있다. 그렇지만 아동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고려하고 잠재적 피해까지 헤아려 보면 ‘더없이 폐해’다.
사교육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아동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학교는 창의성과 상상력, 정서적 성장을 촉진하는 교육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정책 수립도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아동이 사교육의 압박을 벗어나 질 높은 학교 교육을 받음으로써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고, 아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미국의 뇌 과학자 데이비드 이글먼은 뇌의 지도는 그려져 있지 않으며 경험에 따라 좌우한다는 ‘생후배선’(livewired) 개념을 내세워 유·아동기 시절의 뇌 성장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동이 겪는 경험이 아동의 미래와 직결한다는 것이다. 과도한 사교육은 아이들의 정서 발달과 두뇌 성장에 여러 가지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사회공동체는 아동들이 건강하고 다재다능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아동의 권리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아동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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