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진정한 의미는
[[휴심정] 김형태변호사의 공동선]
오랜만에 전철을 탔습니다. 은빛 쇠 의자가 차가운 느낌이었는데 막상 자리에 앉고 보니 따끈따끈하더군요. 시린 손을 따뜻한 의자에 대고 녹이면서 참 좋은 세상이다 싶었지요. 그런데 전철 안 풍경이 놀랍다 못해 기괴했습니다. 노인이고 젊은이고 할 것 없이 전부 똑같은 자세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다. 그때 옆 칸에서 한 아주머니가 건너오더니 집단 핸드폰 중독의 정적을 깨뜨리며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 믿어 구원받으세요.” 짧은 몇 마디 말로 기독교 교리를 요약하고 있었지만 막상 전도 효과는 빵점으로 보이더군요. 나도 고등학생 시절 개신교 선배로부터 전도를 받고 남산 공원에 가서 저런 적이 있습니다. 저 불쌍한 사람들에게 어서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줘야지.
이제 나이 좀 들고 보니 몇 마디 교리나 말로 예수님 가르침을 요약하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 아주머니가 간절히 외치는 ‘나’의 구원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죽어서도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사는 거? 나의 지금 모습, 생각, 세상과의 관계, 걱정거리 그대로 영원히? 그게 아니고 내가 거룩해져서 지금 모습, 생각, 가족, 친구 관계가 다 바뀌는 거라면, 그걸 ‘나’라 할 수 있을까. 불교의 윤회도 그렇습니다. 전생에 내가 개였는데 착한 일을 해서 보살로 태어났다가 지금의 나로 윤회하고 있다? 전생의 개나 보살은 지금의 나와 전혀 관계가 없으니 ‘내가 윤회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나’는 세상에 단 한 번뿐인 이 몸과 이 마음, 이 세상과의 여러 관계들의 총합이고 이게 바로 나라는 개체의 정체성이자 한계이기도 합니다. 이 개성을 떠나면 더 이상 내가 아니니 내가 거룩해져서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건 ‘이 말썽 많고 탈 많은 나’가 아닌 내 속의 하느님이 거룩하시고 영원하시다는 뜻이라고 새겨듣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우리는 ‘알파고’라 불리는 인공지능과 바둑 세계 1등 이세돌이 벌인 승부를 보고 커다란 충격에 빠졌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장치가 어떻게 그 복잡한 바둑 두는 방법을 스스로 ‘학습’해낸다는 걸까. 어떻게 스스로 수 싸움을 해서 사람을 이길 수 있다는 걸까. 요즈음은 한 걸음 더 나가 인공지능이 논문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작곡도 한다니 그야말로 물질과 생각의 경계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 거지요.
근세 서양 철학의 기초를 놓은 데카르트는 연장(延長), 즉 물질을 사유와 철저히 구분했습니다. 우리도 사유, 생각을 물질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여깁니다. 생각은 그 실체를 잡을 수는 없지만 그런 게 분명히 있다고, 영혼도 이런 차원의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을 다루는 건 자연과학이고, 생각이나 영혼을 다루는 건 형이상학이라고들 하지요. 그럼 컴퓨터가 바둑의 수를 학습하고 그림을 그리는 창조 활동을 하는 건 물질의 차원일까요, 형이상학의 차원일까요.
나는 오랜 세월 공부를 해 오면서 생각을 다루는 형이상학과 물질, 자연을 다루는 형이하학을 나누는 게 무지의 소치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자연, 물질’은 감각기관으로 파악할 수 있는 연장, 질애(質碍)를 지니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인과법칙을 따르는 데 반해서, ‘생각’은 눈에 안 보이고 예측이 안 되는 신비의 영역이라는 구분이 인공지능 덕분에 확실히 깨져나가고 있습니다.
사실 물질의 영역도 눈에 보이지 않고 잡을 수 없는, 그리고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닌 소위 형이상학적 속성을 똑같이 지니고 있습니다. 수소 분자 둘과 산소 분자 하나가 합쳐지면 수소, 산소와는 전혀 다른 모양과 특질을 가진 물이 탄생합니다. 수소와 산소가 합치면 물이 되는 게 인과법칙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이건 그 결론만을 두고 법칙이라 이름 붙인 것이지 사람의 머리로는 이런 창발(創發)의 과정을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수소와 산소가 모여 전혀 새로운 물이 출현하는 물질 과정 역시 신비로운 형이상학입니다. 이 신비의 과정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창조’라고 표현하고,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 부르던가요.
요즘 거실 화분에 붉은 동백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저 동백나무는 햇빛과 흙과 물을 가지고 붉은 꽃들을 피워냅니다.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지요. 이 과정도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며,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닌 신비입니다.
인공지능은 0과 1이라는 이진법의 단순 분류 시스템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규칙을 사람이 집어넣어 주면 셈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분류의 범주가 점점 고차원으로 복잡해지면 컴퓨터는 정보도 검색하고 영상도 보여줍니다. 비록 컴퓨터 하드웨어라는 물질에서 출발했지만 이제 ‘생각’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사람이 컴퓨터 하드웨어에 ‘지시’를 넣어주는 것이 필수 요소이지만 알파고가 바둑의 많은 경우의 수를 토대로 스스로 ‘학습’해서 스스로 새로운 수를 ‘생각’해내기에 이르면 이제 물질이 아니고 형이상학의 영역입니다.
인간 고유의 형이상학적 특성인 ‘생각’을 열심히 연구해 온 뇌신경과학에서는 더 이상 생각이 물질과 별개의 차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최초로 출현한 단세포는 35억년 진화과정을 통해 단백질 덩어리인 뇌신경세포들을 이루어냈습니다. 이 신경세포들이 무한에 가까운 다양한 상호연결망을 형성해서 그때그때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가 이야기하는 무슨 감성이니 이성이니 영혼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따로 있어서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생명체의 뇌는 인간이 컴퓨터에 입력하는 규칙, 지시라는 ‘가치’(value) 대신에 ‘생존’이라는 가치가 작동의 기초가 되는 것이죠. 생존이라는 가치는 오랜 세월 진화의 과정에서 ‘물질’인 유전자(DNA)를 통해 전해지는 거구요. 요컨대 생각, 영혼이라는 종래의 형이상학 영역들이 다 물질에 기초해서 창발 된 현상일 따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물질에 기초한 이 생각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으니 그 결과물이 바로 ‘나’입니다.
물, 동백꽃, 알파고, 나를 인식하는 ‘나’는 모두 물질에서 출발해서 물질을 넘어서는 신비의 산물입니다. 이 신비를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라, 힌두교에서는 브라만이라, 불가에서는 법신, 진여, 리(理)라 부릅니다. 이 신비가 인격이 되신 분이 예수요, 크리슈나요, 석가세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때는 저 ‘신비’의 다 같은 자녀들인 이웃을 사랑할 일이요, 죽으면 이 거추장스러운 개체성을 벗고 전체이신 저 신비의 품으로 돌아갈 겁니다.
전철에서 아주머니가 열심히 외치는 ‘예수님 믿어 구원’이란 이런 거라고 나는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글 김형태 변호사(공동선 발행인)
*이 시리즈는 격월간지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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