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희칼럼] 전세의 배신

심윤희 기자(allegory@mk.co.kr) 2023. 5. 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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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사다리 전세가
사기꾼 투기수단 된 건
전세대출 등 정책실패 탓
제도 대수술 불가피하다

"내 전세금은 돌려받을 수 있는 건가" "집주인을 어떻게 믿고 거액의 전세금을 맡기나".

인천 미추홀구를 비롯해 전국에서 전세사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전세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피해자를 대거 양산한 빌라시장은 전세 거래량이 급감하면서 초토화됐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세입자들이 빌라시장을 떠나는 '빌라 전세 런'까지 벌어지고 있다. 서민들의 내 집 마련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전세제도가 시장의 불신을 받는 애물단지로 전락한 것이다.

전세는 영어로도 'jeonse'로 쓸 정도로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다. 1910년 조선 통감부가 작성한 문서에 등장했으니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목돈이 필요한 집주인과 고정비 부담을 줄이고 싶어 하는 세입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져서 생겨난 임대 형태다. 이사 갈 때 돌려받는 보증금과 그동안 모아온 돈을 합쳐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어 '주거 사다리'로 여겨졌다.

그런 전세가 사기의 온상이 돼 무주택 서민들을 배신하게 됐다. 사기꾼들이 벌인 짓이지만 이들이 서식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준 건 정부의 정책이었다. 사기꾼의 먹잇감이 된 것은 전세자금 대출제도다. 2008년 서민 주거안정 명목으로 만들어진 전세대출은 소득과 상관없이 전세보증금의 80~90%까지 빌려주는 제도다. 보증기관이 최대 100% 보증을 제공한다. 이명박 정부 때 1억원으로 출발해 2억원까지 확대됐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5억원까지 늘었다. 전세대출 확대는 전세금과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문재인 정부가 2020년 시행한 임대차 3법이다. 4년간 전세금을 못 올리게 되자 집주인들은 한 번에 대폭 올렸고, 이에 따라 전세대출도 폭증하게 됐다. 문 정부는 주택담보대출에 대해서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적용했지만 전세금 대출 규제는 느슨했다. 그 결과 은행권 전세대출 잔액은 2018년 9월 64조원에서 2022년 10월 171조9000억원으로 4년 새 세 배 가까이 늘었다. 세입자가 은행에서 빌린 전세금은 집주인의 갭투자의 밑천이 됐고, 결국 집값 상승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 됐다. '무자본 갭투자'에 나선 사기범들이 노린 것도 세입자들의 전세대출이었다. "전세대출을 활용하면 전세금의 10~20%만으로 빌라에 입주할 수 있다"며 세입자들을 부추긴 것이다. 하지만 이후 금리 상승으로 전세금과 집값이 하락하자 보증금 반환이 어려워지면서 전세사기의 전모가 드러났다.

정부가 부랴부랴 '전세사기 특별법' 제정에 나섰는데 피해자 구제와 전세사기꾼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야당 일각에서 정부가 피해금액을 우선 갚아주는 '선보상, 후구상권 청구'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는 공정성 논란이 크다는 점에서 선을 그어야 한다. 또 집값·전셋값 급락으로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깡통전세'와 '역전세'란 시한폭탄도 도처에 널려 있어 이에 대한 대책도 서둘러야 한다.

전세제도 자체를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전세대출이 범람하면서 '강제 저축효과'라는 순기능은 퇴색되고 '은행 월세'나 다름없다는 비판도 많다. 하지만 전세 거주자가 2020년 기준 국민의 15.5%인 상황에서 인위적인 폐지는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 전세는 집값 급등락 때마다 종말론에 직면했지만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매달 소모성으로 지출해야 하는 월세보다 전세가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세입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전세가 소멸되면 모를까, 정부가 나서서 없앨 일은 아니다. 다만 전세 포비아가 커진 만큼 무분별한 전세대출 축소 등 전세제도의 대수술을 서둘러야 한다.

[심윤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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