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된 포도 품종 '가메'…보졸레에서 화려한 부활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의 와인 이야기]

김기정 전문기자(kijungkim@mk.co.kr) 2023. 5. 3. 16: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6 프랑스 보졸레 와인
2023 보졸레 마스터클래스에 나온 보졸레 와인들. 왼쪽부터 도멘 데 떼르 도레(보졸레), 비뉴롱 데 피에르 도레(보졸레), 알렉상드르 뷔고(브루이), 샤토 띠뱅(꼬뜨 드 브루이), 샤토 드 라 피에르(레니에), 장 에띠엔 셰르메트(모르공), 샤토 드 플뢰리(플뢰리), 샤토 뒤 물랭-아-방(물랭-아-방).

와인을 잘 몰랐던 시절에도 '보졸레 누보'라는 이름은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보졸레(Beaujolais)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지역 이름입니다. '누보(Nouvau)'는 '햇' '첫'이란 의미로 '보졸레 누보'는 보졸레에서 나오는 햇와인을 의미합니다. 통상 늦여름 수확한 포도를 2~3개월 양조와 단기 숙성시켜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 전 세계에 동시 출하합니다.

프랑스 부르고뉴와 보졸레가 모두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이라 보졸레와 부르고뉴가 전혀 다른 지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행정구역상 보졸레는 부르고뉴의 남쪽 끝 지명입니다. 하지만 와인을 얘기할 때 부르고뉴와 보졸레는 전혀 다른 생산지입니다. 그 배경에는 '가메(Gamay)'라는 포도품종의 퇴출사건이 있습니다.

부르고뉴의 공작이던 필립 2세 르 하르디는 와인 애호가로 부르고뉴 지역의 레드와인은 '피노누아' 품종만을 사용할 것을 명령합니다. 부르고뉴 땅에선 피노누아로 와인을 만들었을 때 맛이 가장 좋고 가치도 가장 높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피노누아'라는 명칭도 필립 2세가 검은 솔방울(black pine cone)을 닮았다고 해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부르고뉴 농부들은 부르고뉴 포도밭에 가메 포도품종을 심기도 했는데요. 구에 블랑(Gouais Blanc)과 피노누아의 혼합종인 가메는 키우기도 편하고 빨리 잘 자라서 농부들이 선호했습니다.

부르고뉴 땅에서 가메를 발견한 필립 2세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필립 2세는 가메를 "매우 사악하고 매우 불충(disloyal)한 포도품종"으로 규정하고 부르고뉴에서 자라고 있는 가메를 모두 뽑아버리라고 칙령을 내립니다. 소위 '가메 퇴출' 사건입니다.

지난달 25일 열린 '2023 보졸레 마스터클래스'에서 카롤린 산토요 보졸레와인협회 디렉터(왼쪽)와 양윤주 소믈리에가 보졸레 와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소펙사코리아

부르고뉴의 남쪽 끝에 위치한 보졸레 지역은 척박한 땅입니다. 예민한 포도품종인 피노누아가 유독 보졸레에선 잘 자라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경작이 쉬운 가메 품종이 보졸레를 장악합니다. 결국 보졸레는 '부르고뉴에선 피노누아만으로 와인을 만든다'는 공작 칙령의 예외지역으로 인정받습니다.

보통 와인은 오랜 기간 숙성되면서 점점 맛있어지는 숙성잠재력을 좋은 와인으로 평가합니다. 보졸레 '가메'는 숙성잠재력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가메로 만든 보졸레 와인은 피노누아로 만든 부르고뉴 와인에 비해 높은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네고시앙(중간 상인) 조르주 뒤뵈프는 이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 마케팅 방법을 고민합니다. 시간을 들여 '숙성'해야 한다는 의미는 오랜 기간 돈이 잠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포도 수확을 해서 바로바로 팔 수 있다면 자금 흐름이 더 좋아진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뒤뵈프는 그해에 수확한 포도로 바로 만들어 마시는 '신선한 과일 맛의 햇와인'이란 이미지로 마케팅을 펼칩니다. 부르고뉴에서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던 '가메'가 보졸레에서 '누보' 마케팅을 통해 백조로 재탄생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보졸레 누보 출시에 맞춰 프랑스 정부는 1985년부터 '보졸레 누보 판매 개시일'을 정하고 각종 행사를 열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마침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도 와인 수입 자유화로 '보졸레 누보'는 한국 와인 소비자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심어줬습니다.

하지만 미국, 칠레, 호주 등 신대륙 와인이 쏟아지면서 보졸레 누보는 테이블 와인 정도의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와인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합니다. 보졸레 와인 생산자들은 보졸레 누보는 신선한 와인으로 마케팅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10 크뤼 보졸레'와 같은 프리미엄급 와인 생산에도 심혈을 기울입니다.

또 '내추럴 와인'에도 주력해 와인업계에선 보졸레 와인은 '내추럴 와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신선한 자연 그대로의 맛이란 점에서 '누보'와 마케팅 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2023 보졸레 마스터클래스'가 보졸레와인협회(Interbeaujolais) 주최, 소펙사코리아 주관으로 소피텔 앰배서더 서울 호텔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마스터클래스는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2018년 이후 무려 5년 만에 재개되어 더욱 의미가 있었습니다 .

세미나에선 초청 연사로 카롤린 산토요 보졸레와인협회 디렉터가 보졸레 토양의 역사에서부터 포도품종, 테루아(Terroir) 및 와인 양조 특성 등을 설명했습니다. 통역을 맡은 양윤주 소믈리에는 2016년 한국 소믈리에 대회 우승자로 통역뿐 아니라 와인에 대한 의견과 어울리는 한식 페어링도 소개했습니다.

이날 보졸레 마스터클래스의 핵심은 보졸레의 떠오르는 미래로 보이는 '10개의 보졸레 크뤼' 와인들이었습니다. 브루이(Brouilly), 쉐나(Chenas), 쉬루블(Chiroubles), 꼬뜨 드 브루이(Cote de Brouilly), 플뢰리(Fleurie), 줄리에나(Julienas), 모르공(Morgon), 물랭-아-방(Moulin-a-Vent), 레니에(Regnie), 생-따무르(Saint-Amour) 등 10개의 와인을 '10 크뤼(10 Crus)'라고 부릅니다.

보졸레 와인은 생산지에 따라 크게 보졸레, 보졸레 빌라쥐, 보졸레 크뤼 3개 종류로 나뉩니다. 예전에 부르고뉴 와인의 경우 와인 라벨을 표기할 때 지역단위-마을단위-밭단위로 범위가 좁아질수록 고급 와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습니다. 보졸레 와인도 보졸레-보졸레 빌라쥐-보졸레 크뤼로 가며 범위가 점점 좁아지며, 최상급의 마을단위 포도 산지가 바로 10 크뤼에 해당합니다

보졸레와인협회에 따르면 보졸레 와인의 50% 정도가 누보로 판매되며, 보졸레 빌라쥐 와인은 25%가 누보로 판매됩니다.

산토요 보졸레와인협회 디렉터는 "국가별로 보졸레 와인을 수입하는 특징이 있는데 미국은 빌라쥐 와인, 영국은 크뤼 와인, 일본은 누보 와인을 많이 수입하고, 한국은 크뤼 와인의 수입 비중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보졸레 10크뤼의 등장으로 '가메' 포도품종으로도 충분히 숙성잠재력이 있는 와인을 만들수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일부 10크뤼 와인은 프리미에 크뤼(1er Cru)급 가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소펙사코리아 관계자는 "가메가 숙성잠재력이 약해서 보졸레 누보가 만들어졌다기보단, 똑같은 가메로 만들어도 보졸레 누보와 숙성해 만든 보졸레 와인은 맛이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했습니다.

보졸레 누보는 포도를 으깨지 않고 송이째 발효해 포도알 안에서 과즙의 발효가 시작되도록 만드는데, 이를 탄산침용(Carbonic Maceration)이라고 하며, 이 방법을 사용하면 타닌이 거의 없는 와인이 만들어지므로 숙성 없이 바로 마실 수 있습니다. 반면 10크뤼 보졸레 와인은 발효온도를 높이고 탄산침용 시간을 늘려 타닌이 진한 장기 숙성 와인이 만들어집니다.

이번 시음회에 나온 보졸레 와인은 맛의 공통점보다 달달한 딸기향, 풍선껌향 같은 공통적인 향이 특징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와인은 장-에띠엔 셰르메트 2019(모르공)와 샤토 뒤 물랭-아-방(물랭-이-방) 2019입니다.

장-에띠엔 셰르메트의 모르공 레 미꾸 2019는 처음엔 스파이시한 맛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좀 더 마셔보니 멘토스를 깨물었을 때의 화한 느낌이 입안 가득 퍼지는 게 매력적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타닌에 산도도 좋습니다. 달달함이 향에서도 올라오고 뒷맛에도 남아 있습니다 .

물랭-아-방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졸레 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졸레의 왕'이란 표현도 쓰는데요. 이날 시음한 와인 중에 물랭-아-방이 가장 부드러웠습니다.

저는 와인의 복합미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복합미가 우수한 와인에 점수를 후하게 주는 편인데 이 두 가지 와인이 상대적으로 복합미가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양윤주 소믈리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와인 메이커 또는 산지의 특징이라기보다도 2019년 빈티지의 특성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윤주 소믈리에는 "2019년 빈티지를 '지킬 앤드 하이드'라고 부른다"면서 "처음에는 섬세했다가 나중에는 풍만하게 반전하는 맛이 지킬 앤드 하이드의 성격 같다"고 말했습니다.

샤토 드 플뢰리 2021(플뢰리)은 피노누아와 비슷한 느낌인데 피노누아보다는 다소 생과실향과 꽃향이 강했습니다. 이 와인 역시 SO2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됐는데요. 보졸레 특유의 건강하고 신선한 맛이 느껴졌습니다.

소펙사코리아 관계자는 "보졸레에도 숙성잠재력이 충만한 10크뤼 와인이 만들어진다"면서 "보졸레 토양의 다양성으로 인해 가메 품종으로 다양한 와인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리는 게 이번 마스터클래스의 취지"라고 설명했습니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