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주친, 그대’ 책 읽는 여자가 위험하다고? 왜? [김재동의 나무와 숲]
[OSEN=김재동 객원기자] ‘봉봉다방’ 성냥갑은 우정리 연쇄 살인범의 시그니처다. 사건 현장마다 남아있었다. 타임머신 소유주가 된 윤해준(김동욱 분)의 2022년 피살현장에도 남아있었고 2021년 백윤영(진기주 분)의 엄마 이순애(이지현 분)의 자살 현장에도 남아있었다.
KBS 2TV 월화드라마 ‘어쩌다 마주친, 그대’(백소연 극본, 강수연 연출)가 영화 ‘백 투더 퓨처’와 같은 타임머신 모티브를 타고 방영을 시작했다. 작가는 “긴 시간에 걸쳐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이야기, 긴 시간에 걸쳐 잘못된 선택들을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긴 시간에 걸쳐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그런 이야기를 그리고자 한다”고 작의를 밝혔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의 여정을 이끌어가기 위해 주인공 윤해준과 백윤영에게 타임머신이란 장치를 안겨주었다. 이들이 오랜 여정을 떠나는 동기는 각각 1년 후 자신의 죽음(윤해준)과 엄마의 자살(백윤영)이다.
먼저 시작은 윤해준이다. 나이 50에 은퇴해 유유자적한 노후를 꿈꾸던 기자 출신 앵커 윤해준은 타임머신을 획득한 김에 해당 해인 2037년으로 떠나본다. 하지만 그곳에 자신은 없었다. 자신은 2022년 35세의 나이로 피살당했다는 사실만 알게 된다. 피살현장에 남겨진 봉봉다방 성냥갑은 오래전 우정리 연쇄 살인범의 시그니처였고 범인으로 지목돼 30년 수감생활 중이던 사람은 이미 2021년 출소를 하루 앞두고 교도소에서 목 매 죽었음을 알게 된다.
진범은 따로 있고 그 진범 손에 자신이 죽으리란 사실을 알게 된 윤해준은 모든 것의 시작인 1987년 우정리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한편 윤영은 모진 소리로 떠나 보낸 엄마가 그 밤 우정리란 낯선 곳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됨에 따라 공황상태에 빠진다. 윤영 역시 현장에서 발견한 봉봉다방 성냥갑을 아무 생각없이 습득한 후 방황하다 1987년으로 복귀 중인 해준의 타임머신에 치여 함께 1987년 우정리에 떨어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19살 여고생 엄마 순애(서지혜 분)를 만난다.
윤영의 소지품에서 봉봉다방 성냥갑을 발견한 해준은 갑속의 메모를 펼쳐본다. 범인은 성냥갑만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메시지도 있었다. 물에 번진 그 내용은 해준이 자신의 피살 현장에서 습득한 성냥갑 속 메시지와 동일했다. “책을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책도 있다. 2006년 첫 발간된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의 작품으로 재판은 2012년 나왔다. 성경을 든 성녀 마리아에서 율리시즈를 읽고 있는 마릴린 먼로까지13세기부터 21세기까지 여성 독서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성경이 인류의 ‘출(出) 에덴동산’ 이유를 이브의 호기심으로 규정한 이후 여성의 독서는 위험한 행위로 간주되어 왔다. 1893년에 이르러서야 뉴질랜드가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인류가 여성의 사회참여를 얼마나 오래도록 금기시 해왔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볼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책읽기의 위험성은 전에 하던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것, 전에 하지 않던 일을 하게 되는 것에 있다... 책을 읽으면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독립적이 되며, 독립적인 사람은 대열을 벗어나 적(敵)이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가정사에 매진해야 될 여성들의 책읽기는 가치를 전복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우정리 연쇄 살인에서도 같은 메시지가 남아있었는 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슈테판 볼만의 책과는 무관한 범인이 창안한 메시지겠지만, 어쩐지 의미는 궤를 같이할듯 싶다.
먼저 주요 등장인물과 사건이 책과 연관 돼 있다. 여주인공 백윤영은 출판사 편집자다. 베스트셀러 작가 고미숙(김혜은 분) 담당이다. 고미숙이 19살 때 쓴 첫 작품 ‘작은 문’에 매료돼 입덕했다. 하지만 편집자로서 고미숙을 담당한 이후 고미숙의 문장은 전혀 윤영의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윤영의 난도질 검수를 마치고야 출간되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 십상이라서 고미숙도 불만은 있지만 수긍하는 편이다.
1987년에 떨어진 윤영은 자신을 고미숙 작가 찐팬으로 만든 ‘작은 문’의 초고를 엄마 순애의 비망록에서 발견한다. 의문의 시작이다.
19살 순애는 책 읽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글쓰기도 좋아하던 소녀였다. 그런 범생이 기질은 순애를 또래집단에서 소외시켰고 순애는 자신을 괴롭힐지언정 상대해주는 해경(김예지 분), 은하(권소현 분), 유리(강지운 분) 등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해경 등의 질 나쁜 장난에 물에 빠진 엄마 순애를 건져올린 윤영은 ‘작은 문’이 고미숙의 도작임을 확신하고 괴롭힘에 앞장 선 해경을 의심해 “고미숙?”하고 물어보지만 “어떻게 저를 아세요?”란 답은 엉뚱한 곳에서 들려온다. 19살 여고생 고미숙(지혜원 분)과의 상면. 고미숙은 확실히 엄마 순애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윤영은 긴 시간에 걸쳐 곁에 있던 엄마 순애를 알지 못했다. 출판사 편집자로 있으면서 작가 사인된 책 한권 얻고 싶어하는 엄마의 바람을 외면했다. ‘엄마가 무슨 책을 읽어?’싶은 얕잡는 심리가 있었다. 웬걸. 자신을 감동시킨 작가였다. 2021년 고미숙이 누리는 영화를 누려 마땅한 작가의 소양이 있었다. 그랬다면 편집자로서 윤영이 고미숙의 난삽한 문장과 씨름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2021년 후회 속에 떠나 보낸 엄마 순애에 대한 윤영의 이해가 시작됐다.
어쨌거나 현재는 우정리 연쇄살인에 대한 정보가 드러나지 않았다. 윤해준이 피살된 거로 보아 피해자가 다 여자였는지도 불분명한 판이라 범인이 남긴 ‘책을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는 메시지가 어떤 의미를 갖는 지는 모호하다. 곁의 사람을 이해하고 잘못을 바로잡고 사랑을 만들어가는 감동과 함께 이 메시지의 함의를 찾아가는 과정도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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