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팔고 투자해라" 지시에 M&A 멈춘 SK그룹

2023. 5. 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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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금은 자산 매각으로 마련하라" SK그룹 '투자 신중론' 회장 지시
자금 조달 빨간불 켜지며 대규모 M&A도 멈춰…올해 성사는 '0'
고민 깊어진 계열사 CEO "일단 자산 매각 성과에 집중"
이 기사는 05월 02일 09:39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SK그룹의 투자 시계가 멈추고 있다. 외부 자금조달이 쉽지 않아지자 새 먹거리 발굴이 쉽지 않아졌다. "투자하려면 일단 뭐라도 팔고 하라"는 지시가 떨어지면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지난 3년간의 공격적 인수합병(M&A) 행보에 제동이 걸렸다.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 경영진들에게 '투자 신중론'을 강조하고 있다. "투자하고 싶으면 뭐라도 팔고 그 돈으로 하라"는 고위 관계자의 지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수펙스는 2020년 최태원 회장이 '파이낸셜 스토리'를 외친 이후 수년간 계열사들의 투자 활동을 적극 지원해왔다. 수펙스는 SK그룹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모여 협의를 진행하는 M&A 전진기지다. 계열사 최상단에 위치해 조직의 두뇌 역할을 맡아왔다. 계열사 자율 경영이 원칙이지만 사업 방향과 목표는 최태원 회장과 수펙스도 나서 의견을 조율한다.

SK그룹 수펙스는 미래 먹거리에 공격적인 투자를 외쳐왔다. 이를 위해 자본시장과 적극적으로 교감하면서 조(兆) 단위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작년부터 전세계적으로 경기가 위축되면서 외부 조달이 쉽지 않아졌다. 여러 계열사가 증시 입성을 목전에 두고 멈춰야 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12월 정부 업무보고에서 "돈이 숨었다. 투자 절벽이 왔다. 기업이 투자를 안 하는 게 아니라 기업도 돈이 없다" 발언하기도 했다. 

지난해 SK에코플랜트의 폐기물 업체 테스(TES) 인수 이후로는 대규모 투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당시 1조2000억원에 지분 전량을 인수했다. 2021년엔 SK(주)와 SK E&S가 미국 플러그파워 지분 9.9%를 1조6000억원에 인수했다. SK하이닉스는 2018년 키옥시아(옛 도시바메모리) 인수에 4조원을 들인 후 2020년에 인텔 낸드사업(솔리다임)을 10조3000억원에 인수했다. 한국 기업 사상 최대 M&A 기록을 세웠다. 그룹 차원 투자로는 베트남이 있다. 2018년 베트남 마산그룹 지분 9.5%를 5300억원에, 2019년엔 베트남 빈그룹 지분 6.1%를 1조1800억원에 인수했다. 2021년엔 베트남 크라운엑스와 말레이시아 빅페이 등을 인수했다.

투자 기업에서 영업이익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룹 최대 자금줄 역할을 해왔던 반도체 사업도 부진하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1조898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주요 이유는 극심한 반도체 불황이지만 솔리다임(옛 인텔 낸드사업부문) 인수가 SK하이닉스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텔에서 사온 중국 다롄 공장은 현재 미국의 반도체 규제 직격탄을 맞았다. 당초 낸드 사업 핵심 거점으로 계획했던 곳이다.

수펙스 내 자체 최고 성과로 꼽혔던 동남아 투자도 찬밥 신세로 전락해있다. SK는 계열사 5곳(SK㈜, SK E&S, SK하이닉스,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은 2억달러씩 출자해 SK동남아투자법인을 세운 뒤 적극 투자해왔다. 2018년엔 2조원 규모로 동남아 기업들에 투자했다. 베트남 최대 음식료그룹인 빈·마산그룹과 그 자회사인 크라운엑스, 빅페이 등이 대상이었다. 투자 당시만 해도 "시대 흐름에 맞는 투자를 했다"며 공로를 인정받았던 건이다. 실무진들이 그해 연말 인사에서 줄줄이 승진하기도 했다.

현재 동남아 사업부문은 수펙스 내 1순위 매각 대상이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SK는 특히 동남아 투자에서 심한 자금 경색에 시달리고 있다"며 "중산층 확대에 따른 소비력 증대를 예상하고 '골드러시'에 나섰지만 예상과 달라 동남아 투자 건은 중단돼 있다"고 전했다.

각 계열사 CEO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수펙스로부터 M&A 허락을 받고 자금을 끌어오려면 뭐라도 하나는 팔아야 한다. 한 관계자는 "제 값 받기도 어려워진 시점에 회수 실적은 좋아야 하니 CEO들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며 "신규 먹거리를 발굴하지 못하면 계열사 자체가 매각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고 전했다. 

신규 투자를 위해 가장 적극적으로 매각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계열사는 SK스퀘어다. SK스퀘어는 지난 3월 SK쉴더스 지분 약 30%를 EQT파트너스에게 8846억원 규모로 매각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는 바이오·헬스케어 자회사 나노엔텍과 이커머스 자회사 11번가의 매각을 추진 중이다. 나노엔텍은 지난해 7월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지만 네 차례나 인수대금 납입이 미뤄지고 있다. 11번가는 투자자와 체결한 약정에 따라 9월까지 매각 성과를 내야 한다.약 5000억원의 투자금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친환경'을 내건 계열사들의 성과 경쟁도 관전거리로 떠올랐다. 현재 SK지오센트릭(구 SK종합화학)과 SK에코플랜트, SK E&S, SKC 등이 인수를 위해 리사이클링 업체를 물색 중이다. 한 회사의 매각 입찰에 여러 곳이 이름을 올려 '계열사 간 교통정리가 안 되고 있다'는 해석이 많았다. 눈에 불을 켜고 M&A 기회를 노리고 있지만 자금 유치가 쉽지 않다. 이전과 달리 그룹 내에서 돈을 끌어오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올 들어 웬만한 폐플라스틱 재활용 업체 인수전에 이름을 올렸지만 성사된 사례가 아직 없다. M&A 성사가 안 되니 업무협약(MOU)만 줄줄이 체결 중이다. 매각 성과를 먼저 가시화한 곳에게 M&A 기회가 돌아갈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은 기자 hazz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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