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세’에서 버려지고 고통받고 죽임당한 존재들의 탐구···나희덕 20년만의 시론집

김종목 기자 2023. 5. 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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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이 20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시론집을 두고 창비에서 처음 제안한 책 제목은 ‘문명의 바깥에서’였다고 한다. 나희덕은 “오늘날 문명의 바깥, 자본주의의 바깥이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싶어서 제목을 ‘문명의 바깥으로’라고 정했다”고 전한다. “자본주의 문명 바깥을 향해 눈을 두고 나아가자는 다짐”이다. 시와 시론을 두고 “성냥팔이 소녀가 필사적으로 그어대던 성냥의 불꽃처럼 이 시대의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힐 수 있다면, 하는 다급함이나 간절함이 있었다”고도 했다.

다급함과 간절함 속에 다짐을 끌어준 시들을 제1부에서 소개한다. “자본주의의 말기적 증상과 심각한 생태위기 속에서 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질문하며 쓴” 글들이다.

제1부 첫 주제 글은 ‘자본세에 시인들의 몸은 어떻게 저항하는가’이다. 나희덕은 ‘인류세(Anthropocene)’ 대신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쓴다. 인류세엔 “지구를 파괴한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해결할 주체 역시 인간이라는 인간중심주의”가 남았다. 이 말은 “인류라는 막연하고 보편적인 가해자를 상정함으로써 어떤 경제적 계층이나 정치적 입장과도 대립하지 않으며, 자본가들의 책임을 은폐하고 모든 사람의 책임인 양 문제를 희석”한다.

나희덕이 ‘자본세’의 디스토피아를 예민하게 감지한 시인으로 꼽은 이가 백무산, 허수경, 김혜순이다. 이들은 “생명과 죽음, 노동과 계급, 문명과 자본주의, 전쟁과 폭력 등에 대한 지속적 탐구와 시적 실천”을 하고, “이 세계에서 버려지고 고통받고 죽임당하는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목소리들”을 드러내왔다.


☞ [전문]“인류 존속을 위해선 ‘격차’와 ‘환경’을 동시에 해결해야”···‘마르크스 연구’에서 기후·경제 위기 해법 찾는 사이토 고헤이 인터뷰
     https://www.khan.co.kr/culture/book/article/202210060600001

“만져질 듯한 별들이 패닉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우주// 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 나는 드러난다/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백무산 ‘패닉’ 중)를 두고 “자연이나 우주의 풍경은 폐허를 인식하게 하는 거울이 되어준 셈”이라고 나희덕은 말한다. 2015년 백무산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중 ‘인양’에 나온 배를 “위험을 적재하고 어둠 속을 항해하는 현대문명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2009년 용산 참사, 2014년 세월호 참사, 2018년 노동자 김용균의 죽음 등 “국가의 폭력과 무책임에 의해 일어나고 방치된 사회적 재난은 ‘지금 여기’의 삶이 폐허임을 말해준다”고 했다.

허수경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중 표제작은 다음과 같다.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부분).

허수경의 시선이 머무는 대상을 두고 나희덕은 “주로 전쟁에 의해 희생되거나 고통받는 사회적, 인종적, 젠더적 약자들이다. 이런 타자들에 대한 섬세한 공감력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에게 닿아 있다”고 말한다.


☞ “나쁜 짓을 안 하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모은대?”…정치학자 채효정의 ‘먼지의 말’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109241147001

김혜순의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 표제작은 300만마리가 넘는 돼지들이 잔인하게 살처분되거나 생매장된 일을 다룬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부분).

나희덕은 김혜순이 희생된 돼지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돼지들이 ‘되어’ 말하는 점에 주목한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울음이고, 비명이고, 한숨이다. 이 고통스러운 ‘돼지-되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문명 속에 처한 상황이 구덩이에 던져지는 돼지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나희덕 시인. 창비 제공

나희덕은 세 시인의 ‘흙’을 다룬 시들을 ‘인간 이상의 것, 인간 아닌 것, 비인간적인 것, 부식토로서의 인간 등 땅 아래 숨어 있는 힘’에 주목한 개념인 툴루세(Chthulucene) 관점에서 분석한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1947~2020)의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 중 “순환적 삶의 질서 회복과 흙의 문화의 중요성”을 다룬 문단을 인용한다.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삼인, 2018) 중 ‘인간, 흙, 상상력’에서 “우리 자신이 흙이나 자연 또는 우주와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을 강조한 글도 옮겼다.

책머리와 다른 주제 글에서도 김종철을 여러 차례 인용한다. 나희덕은 “선생님과 <녹색평론> 덕분에 문명에 대한 비판적 생각과 시인으로서의 소명감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문학적 스승과 동료가 되어준 시인들에 관한 2부 시인론에도 ‘문명의 파수꾼 김종철’을 실었다. 나희덕은 “정신의 지향이 누구보다도 시인에 가까웠다”고 전한다.

나희덕이 자주 되새겼던 시인에 관한 김종철의 정의는 자본 문명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시인들의 저항과도 이어진다. 1978년 <시와 역사적 상상력>(문학과지성사)에 나온 “시인은 성자가 아니고, 타락되고 오염된 세상 가운데서 타락의 힘에 의지하여 진실에 이르려는 사람”이다.


☞ [아침을 열며]탐욕의 경제학과 급진적 삶의 전환
     https://www.khan.co.kr/opinion/morning-column/article/201907142056015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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