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원의 영점조정] ‘글로벌 허브’도 되고 해외도 진출하겠다는 한국금융
돈은 돈이 불린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으로 부(富)를 쌓긴 여간 어렵지 않다. 이익이 날 만한 곳이어야 투자자가 몰리고, ‘돈을 융통한다’는 의미의 금융(金融)이 꽃 핀다. 이런 흐름은 역사가 증명한다. 문명의 발상지에서 문자가 발명된 건 금융계약을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12세기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선 현대적 금융상품시장이 탄생했다. 도시 중심부인 리알토(Rialto)는 유럽 최대의 상업 중심지 중에서도 ‘금융 심장부’였다고 윌리엄 N. 괴츠만 미국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고찰했다. 부호·금융업자·투자자·투기꾼·은행업자 등이 모여들어 다양한 금융서비스가 번성했다면서다. 정부가 채권을 처음 발행하는 혁신을 이루기도 했다.
영국·네덜란드는 해외 무역을 위해 금융 시스템을 갈고 닦았다. 유럽 입장에선 아시아·아메리카와 교역할 종잣돈을 모을 수단으로 주식회사라는 금융구조도 고안·발전시켰다. 요컨대 금융·금융중심지는 켜켜이 쌓인 역사·문화, 제국주의적 속성과 함께 진화했다. 미 뉴욕의 월스트리트도 기축통화인 달러 패권으로 세계 금융계를 호령하고 있다.
가진 게 빈약해 명함도 내밀기 힘든 한국은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전략’을 2003년 내놓았다. 금융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하겠다는 복안에서다. 세계 주요 금융기관을 한반도에 유치하겠다는 야심 찬 전략은 올해로 20년을 맞는다. 국가가 금융중심지를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금융중심지법’이 나온 지도 15년 됐다.
성과는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다. 허브가 되지 못했지만 수준을 가늠할 기준점 격인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서 약진한 것처럼 보여서다. 갈 길이 먼데, 무게 중심은 분산되는 조짐이 포착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 금융산업의 선진화·국제화·경쟁력 강화를 강조했다. 당국은 득달같이 ‘금융 국제화 대응단’을 꾸렸다. 국제화를 위해선 외국 금융사 국내 유치(인바운드)와 국내 금융사의 해외진출(아웃바운드)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지만, 정부의 시선은 아웃바운드에 맞춰질 수밖에 없는 국면이다. 20년짜리 금융허브 전략의 ‘완전한 출구’를 찾는 게 아니라면 교통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싱가포르·홍콩의 벽...명확해진 한계
GFCI 산출 기관인 지옌(Z/Yen)그룹의 마이클 마이넬리 대표와 휴 모리스 선임조사파트너는 본지 e-메일 인터뷰에서 “서울이 국제금융중심지로 발전하는 데 상당한 진전을 이뤘고, GFCI 내 상위 10대 금융중심지에 진입한 건 큰 성과”라고 했다. 한국 금융당국은 금융중심지추진위원회를 통해 2009년 1월 서울 여의도·부산 문현지구 등 2곳을 금융중심지로 지정했는데, 서울이 올해 3월 10위를 기록한 만큼 지옌그룹은 한국의 노력에 긍정 평가를 내린 셈이다.
지옌그룹은 “GFCI 순위에서 10위와 2위의 격차가 17점으로, 이례적으로 근소하다(exceptionally close)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은 714점, 영국 런던은 731점이란 점을 부각한 것이다. 서울의 2009년 3월 순위가 53위에 불과했던 걸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하지만 37위로 내려앉은 부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관건은 서울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느냐다. 아시아권에서 추격 대상을 좁히면 싱가포르(3위·723점), 홍콩(4위·722점), 상하이(7위·717점) 등 3개 도시다.
지옌그룹은 ‘서울이 싱가포르·홍콩보다 덜 매력적인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하자, “서울은 정량적 측정상 많은 영역에서 싱가포르·홍콩보다 낮은 점수를 얻었다”며 “특히 비즈니스 환경·평판 요소와 관련된 측정에서 136개 항목의 점수가 낮았다”고 설명했다.
이를 냉정하게 풀면 서울은 싱가포르·홍콩과 견줘 금융사업을 하기에 유리하지 않고, 글로벌 금융 인력이 내리는 평가도 후하지 않다고 정리할 수 있다. 전문가는 한국의 경제규모가 다른 국가보다 작고, 법치 수준도 높지 않은 데다 정주 여건도 외국인을 끌어들이기엔 부족해 아시아권에서도 1위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국 정부 입장에선 소득세를 낮추고, 생활 인프라도 개선하는 등 외국 금융사 유치에 공을 들였다.
그러나 더 치고 올라가지 못하는 한계가 명확해지는 국면으로 보인다. 한국에 진입한 외국계 금융사의 수는 2010년 123개에서 2018년 163개로 늘었지만 이후엔 정체 상태다. 서울엔 외국 금융사의 아시아 태평양 지역 본부가 없지만, 싱가포르와 홍콩은 유치하고 있다.
서울은 지정학적으로 홍콩이 흔들리는 틈을 타 반사이익을 얻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그러나 실익은 싱가포르에 돌아갔다. 미중 패권 경쟁 와중에 중국이 홍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한 2020년 이후 ‘탈(脫) 홍콩’한 금융사가 새로 둥지를 튼 곳은 서울이 아니라 싱가포르였다. 싱가포르는 작년 9월 나온 GFCI에서 홍콩을 제치고 3위로 올라선 뒤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부 외국계 금융사 관계자는 서울이 아직 늦은 건 아니라고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국 관료 사이에선 금융중심지에 걸림돌로 지적되는 건 세제·노동시장 등 거의 비(非)금융 이슈여서 금융 육성이 ‘최대 역점 사업’이 되지 않는 한 벽을 넘긴 어렵다는 시각이 엄존한다.
尹 관심에 금융 글로벌 진출 드라이브
올해는 3년 단위로 갱신하게 돼 있는 금융중심지 기본계획안의 6차 버전이 나와야 하는 시점이다. 액션플랜의 상위 개념이어서 ‘금융산업 비교우위 분야 지원·인프라 국제화·금융중심지 지원 내실화’ 등 원론적인 내용이 담기지만, 미진한 곳을 메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 의의가 있다. 금융당국은 이달 중 6차 버전을 낼 계획인데, 현재 주력하는 부문은 다른 쪽으로 읽힌다.
국내 금융사의 해외진출 활성화 방안이다. 윤 대통령이 올해 초 금융위원회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금융산업 국제화에 큰 관심을 보였고, 금융국제화 대응단이 구성돼 개선할 점이 뭔지 논의하고 있다. 대응단은 6개월 동안 활동하고, 필요하면 한 차례에 한해 6개월 더 지속할 수 있다.
한국에 외국 금융사를 유인할 묘안을 업데이트하면서 국내 금융사는 해외로 내보낼 궁리에 나선 것이다. 기존 국내 금융 중심지 고도화와 한국 금융사의 해외진출 독려 사이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건지 딱 부러지게 설명할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를 나누는 건 구식’, ‘그동안 부족했던 부분(해외진출)을 키우겠다는 것’ 정도가 주석(註釋)으로 들린다.
한국을 싱가포르 수준의 금융허브로 키우려면 고쳐야 할 법·제도가 많으니 금융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해외진출이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이 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20여년 전부터 금융산업 일류화를 위한 전략을 독려했고, 당국도 2013년 ‘금융의 삼성전자’를 만들겠다고 비전을 발표했지만 결과는 목표에 한참 미달했다.
국내 주요 금융사의 해외 비즈니스 비중은 5~10%다. 일본이 30~40%다. 한국 금융사가 동남아에 많이 진출했다지만, 금융 선진국에선 존재감이 미미하다.
그래도 포기해선 안 되는 게 해외진출이다. 대중문화 분야에서 BTS·블랙핑크가 해외활동을 통해 K-팝을 넘어 한국을 ‘문화 허브’쯤으로 격상시켰듯 K-금융도 당국·민간의 팀 플레이 수준에 따라 발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계에 봉착한 국내 금융중심지도 K-금융 선도 회사가 나오면 돌파구를 찾을 여지가 있다. 지옌그룹은 10년 안에 아시아 3대 증권사가 한국에서 나오는 건 가능하지만 이를 위해선 상당한 자본 투입, 능력있는 인재 배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대선공약, 제3금융중심지...후보 전주 운명은
결국 국내 금융허브 전략과 해외 진출 비전 간 ‘황금비율’을 유지하는 게 현실적 방법이다. 여기엔 정치권이 결자해지해야 할 난제가 있다. 서울·부산에 이어 전북을 제3금융중심지로 선정하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거냐는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공약으로 전북을 금융중심지로 지정하겠다고 했다.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있는 전주시는 자산운용특화 도시로 키우겠다는 계획을 갖고 백방으로 뛰고 있다.
전망은 어떨까. 금융중심지 선정은 절차상 금융중심지추진위원회가 맡는다. 중심지를 하나 더 추가하는 안에 위원회가 찬성하기 힘들 거라는 관측이 있다. 현재 2개도 제대로 안 되는 데 3개가 말이 되냐는 인식이 10명씩 동수(同數)인 민관 위원 사이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코로나19 탓에 2년여간 서면회의만 했던 금융중심지추진위원회는 상반기 중 대면회의를 할 예정이다. 이때 전북을 제3금융중심지로 선정하는 안을 다룰지 불투명하다. 당장 내년 4월엔 총선이 치러진다. 집권 여당으로선 총선 전 득표에 도움될 게 없는 폭발성 강한 이슈를 두고 긁어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다.
일각에선 한국이 정보통신기술(ICT)에 강점이 있는 만큼 전통 금융이 아닌 디지털금융을 통한 글로벌디지털금융중심지 전략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런던·싱가포르가 앞서 나가고 있지만, 세제·행정적 인센티브를 주는 ‘특구’를 조성하면 경쟁할 만하다는 논리다. 애초 지역안배식으로 금융중심지를 정한 원죄도 문제이지만, 뱉어 놓은 말을 지키기 어렵게 된 처지를 원만하게 풀어내는 것도 실력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약은 공수표로 남을 공산이 크기에 현 정권의 결정을 주목한다. 제3금융중심지 지정에 대한 정부 입장은 ‘면밀히 검토 중에 있다’로 파악됐다.
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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