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게 이겨버리는 요키치의 아재농구

김종수 2023. 5. 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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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슬램덩크'에서 최강팀으로 꼽히는 팀은 단연 산왕공고이다. 비록 전국대회 토너먼트에서 주인공팀 북산에게 예상외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지만 어디까지나 여러가지 변수와 분위기 싸움이 영향을 끼친 이변급 경기의 성격이 강했다. 산왕에서 팀 전체 조율을 책임지는 선수는 포인트가드 이명헌이다.


이명헌은 조용하면서도 특별하다. 신현철의 압도적인 골밑 지배력이나 정우성의 폭발적인 득점력같은 눈에 확 띄는 무엇인가를 보여준 것도, 작품의 스토리상 자주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지만 그에게서 적지않은 임팩트를 느꼈다는 팬들도 많다. 고교농구 만화의 특성상 피가 뜨거운 선수들이 상당수인 상황에서 혼자만 차가운 듯 냉정한 카리스마를 뽐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명헌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산왕과 북산의 경기가 막 시작되고 한골씩 주고받는 씬이다. 북산은 강백호가 경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화려한 앨리웁 덩크를 성공시키며 최강팀 산왕을 도발한다. 전력에서 밀리는 팀이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라도 상대를 자극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산왕공고는 꿈쩍도 하지않았다. 팀을 이끄는 야전사령관이 이명헌이었던 이유가 크다. 이명헌은 강백호의 고공쇼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않았고 무표정하게 미들슛을 성공시키고 '같은 2점이다'는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명대사를 날린다. 현재 한창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있는 NBA 플레이오프에서도 이명헌같은 선수가 코트를 지배하고있는 모습이다.


덴버 너기츠의 주전센터이자 간판스타인 ‘조커’ 니콜라 요키치(28‧211cm)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2라운드에 접어든 이번 플레이오프에서는 다양한 선수들이 핫한 화제의 중심에 서고 있다. 여전한 인기를 구가하는 두 슈퍼스타 스테판 커리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와 르브론 제임스의 LA 레이커스가 맞붙게됐으며 큰 경기에 강한 지미 버틀러의 크레이지 모드, 조엘 엠비드-제임스 하든과 제이슨 테이텀-제일런 브라운의 원투펀치 대결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하지만 실상 가상 무서운 선수와 팀은 따로있다는 평가다. 요키치가 이끄는 덴버가 바로 그 대상으로 이를 입증하듯 우승후보로 평가받는 피닉스 선즈를 맞아 2연승으로 시리즈 기세를 확실하게 잡아가고있는 모습이다. 덴버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의 1라운드에서부터 기세가 높았다.


플레이 인 토너먼트를 거쳐 서부 컨퍼런스 8번 시드로 올라온 미네소타는 칼-앤서니 타운스와 루디 고베어의 '트윈타워'를 앞세워 맹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요키치가 지휘하는 덴버의 힘은 막강했고 5차전만에 4승 1패로 2라운드 진출을 확정지었다. 5차전에서 요키치는 28득점, 17리바운드, 12어시스트, 2스틸, 2블록슛으로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며 축포를 쏘아올렸다.


2라운드에서 맞붙은 피닉스는 주전들의 이름값에서는 덴버를 능가한다. 크리스 폴(37‧183cm), 데빈 부커(26‧196cm), 디안드레 에이튼(24‧211cm)의 라인업에 'KD' 케빈 듀란트(34‧208cm)까지 합류했다. 정규리그 서부컨퍼런스 1위팀(덴버)과 듀란트 효과가 기대되는 호화라인업의 대결인지라 팽팽한 승부가 예상됐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자 덴버가 단숨에 2승을 가져가며 흐름을 손에 쥔 모습이다. 1차전에서 덴버는 요키치(29득점, 19리바운드, 5어시스트)가 중심을 잡아주는 가운데 자말 머레이(34득점, 3점슛 6개, 9어시스트), 애런 고든(23득점, 3점슛 3개)이 폭발하며 125-107로 승리를 가져갔다. 피닉스 역시 듀란트가 29득점, 부커가 27득점으로 분전했으나 에이튼(14득점, 7리바운드)이 상대적으로 잠잠했다. 덴버(9개)보다 많았던 16개의 턴오버 수도 치명적이었다.

 


2차전 또한 흐름이 이어졌다. 요키치는 양팀 통틀어 가장 많은 39득점을 올렸고 리바운드도 16개나 잡아냈다. 켄타비우스 콜드웰포프(14득점)와 애런 고든(16득점)이 뒤를 받치며 97-87 승리를 합작했다. 특히 콜드웰포프는 끌려가던 4쿼터 초반 경기를 역전시키는 3점슛 두방을 연속으로 터트리며 덴버 팬들을 열광시켰다.


요키치를 중심으로 전 선수가 돌아가면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잘나가는 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설상가상으로 피닉스는 2차전 당시 주전 포인트가드 폴이 3쿼터에 사타구니 부상으로 코트를 떠났는데, 5차전까지 결장예정이라고 밝혀졌다. 피닉스에게는 악재이고 덴버에게는 호재다.


앞서 언급한 이명헌이 그렇듯 요키치 역시 승리 외에는 관심이 없다. 본래 운동신경이나 스피드 등을 타고나지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요키치를 보면 상상이 안갈 일이지만 그는 2014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41순위로 덴버에 지명됐다. NBA평균수준에도 미치지못하는 운동능력, 기동성 등이 저평가의 원인이 됐다.


높은 BQ에 슈팅능력을 갖췄고 성실함과 침착함이 돋보이는 선수지만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어지간한 스윙맨 못지않게 뛰고 달리는 빅맨들이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서 느린 발과 낮은 점프력을 가진 백인 센터가 무엇인가 특별한 플레이를 할 것으로 기대하기 힘들었다는 분석이다.


결과적으로 모두의 예상은 틀렸다. 요키치는 최근 추세의 빅맨들처럼 활동반경이 넓지는 않지만 탄탄한 신체를 앞세워 포스트 인근을 묵직하게 지켜줄 수 있으며 힘과 기술이 더해진 포스트업은 어떤 빅맨도 뚫어내고 득점을 올릴 수 있는 시그니처 무브다. 거기에 슈팅능력이 워낙 좋아 조금의 빈틈만 보여도 거리를 막론하고 정확한 슛을 꽂아 넣을 수 있다.


여기까지만해도 요키치는 충분히 한팀의 주전센터로 부족함이 없어보이지만 진정한 가치는 따로 있다. '포인트 센터', '컨트롤 타워'라고 불릴 정도로 높고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한 게임조립 능력이 탁월하다. 패싱센스는 물론 상대 수비의 움직임을 읽고 이후 흐름까지 계산하면서 리딩을 전개해나간다. 어지간한 포인트가드 못지않은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의 플레이를 펼친다고 보는게 맞는 표현이다.


이번 플레이오프에서도 실속넘치는 요키치의 아재농구(?)는 계속되고 있다. 요키치는 점프를 거의 안하다시피하고 던지는 미드레인지가 일품이다. 워낙 위치를 잘 잡는데다 패스를 나갈듯하면서 훼이크가 들어가는지라 수비수 입장에서는 타이밍을 잡기가 쉽지않다. 본래 동작을 크게 가져가지않는 선수인만큼 움직임을 읽기가 힘든 유형이다는 평가다.


금방이라도 앤트리 패스를 넣어줄 듯한 동작으로 이마 위에서 그대로 던지는가하면 때로는 자유투라인 인근에서 말 그대로 자유투쏘듯 툭 던진다. 상대가 여기에 신경쓰면 비슷한 폼에서 어시스트가 뿌려진다. 슛거리가 길다보니 에이튼은 어쩔 수 없이 외곽 인근까지 끌려나갈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되면 힘좋은 고든이 일대일로 듀란트에게 거칠게 몸싸움을 하며 괴롭히기 일쑤다.


그렇다고 활동반경이 넓은 빅맨을 쓰면 포스트업으로 압살해버린다. 피닉스 입장에서는 어떻게해도 요키치에게 미스매치가 나고있는 상황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이겨버리는 요키치의 농구가 덴버를 어디까지 끌고갈 수 있을지 주목해보자.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 사진_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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