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상폐시키고 美 가자"…한국선 돈 없어서 기술 개발 못해요
[편집자주] 윤석열 정부가 사이버보안 강화를 공약했음에도 국내 보안업계는 여전히 영세성을 벗지 못하고 있다. 경직된 보안규제가 완화되며 일부 활로가 열렸지만 여전히 투자는 얼어 붙어있다. 각종 해킹피해가 잇따르는 가운데 사이버보안 산업과 유니콘 육성을 저해하는 요인을 짚고 타개책을 모색한다.
국내 증시에 상장된 한 사이버 보안업체 대표는 최근 보안업 홀대현상에 대해 이같이 토로했다. 생성형 AI(인공지능)의 등장으로 디지털전환이 가속화되고 사이버 보안 위협도 덩달아 커졌지만 국내에서는 보안기업이 제대로 가치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내비친 것이다.
지난 4월말 기준 미국 나스닥 상장 사이버 보안 기업 팔로알토는 시가총액이 560억달러(약 75조원)에 이른다. 팔로알토 외에도 크라우드스트라이크(약 38조원). 체크포인트(약 22조원), 지스케일러(약 18조원), 옥타(약 15조원) 등 원화 환산 시총이 조(兆) 단위를 넘어서는 종목들이 수두룩하다.
반면 한국에서는 조 단위 시총인 사이버 보안 종목이 아예 없다. 시총 1위가 안랩(약 6200억원)인데, 창업자인 안철수 의원의 행보에 따라 주가가 널뛰기해 테마주가 됐다. 안랩과 윈스(약 1700억원)를 제외하면 파수, 지니언스, 라온시큐어, 이글루, 파이오링크 등 업력이 오래된 사이버보안 종목은 죄다 1000억원대 언저리에 머물러 있다. 미국과 시장규모 차이를 감안해도 과도하게 저평가돼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물리적 보안을 겸하는 SK쉴더스가 지난해 상반기 조 단위 시총을 기록하는 보안 종목으로 기대를 받았지만 금리상승기 불리한 시장 여건에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으며 상장 자체가 무산됐고 결국 해외 투자자에게 지분이 매각됐다.
그나마 국내 상장사나 대기업 계열사 등은 사정이 낫다. 국내 정보보안 기업 669개사의 93%가 자본금 50억원 미만의 중소기업이다. 669개 전체 매출은 2021년 한 해 4조5497억원, 같은 해 글로벌 사이버 보안 시장(약 177조원)의 2.6% 수준이다. 북한을 비롯해 중국·러시아 등 세계 최고 수준의 해커들과 연일 일전을 벌이며 기술력을 가다듬어온 한국보안업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한국과 비슷한 여건인 이스라엘의 경우 2021년 기준 전세계 사이버 보안 유니콘 42중 6곳에 이름을 올렸다. 체크포인트, 사이버아크, 라드웨어 등이 대표적이다. 이스라엘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사이버보안 산업육성을 위한 기술지원 등 정책자금 투자가 활발하다.
이와 관련 윤석열 정부들어 '국가 사이버 안전망 구축'을 공약하며 경직된 보안관련 규제 완화와 인력양성에 박차를 가하면서 분위기가 다소 반전됐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자금줄은 여전히 말라붙었다는 목소리가 크다. 오랜 보안업 디스카운트로 인해 기술 사업화나 원천기술 확보, M&A(인수합병)을 통한 규모의 경제 구축이 어렵다는 얘기다.
이동범 KISIA(정보보호산업협회) 회장은 "국내 정보보호 산업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중소 정보보호 기업에 '정부주도의 적극적 자금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정부의 의지가 외부에 나타나면 민간 투자기관들도 따라서 움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 중소벤처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정부부처들이 운용하는 정책펀드는 23개에 이르고 이들을 통한 운용 자금의 규모는 1조6200억원에 이른다. 이들 자금은 '모태펀드'라는 이름 하에 각 소관부처별 육성대상 산업의 지원에 활용된다.
그러나 여기에 '사이버 보안' 또는 '정보보호'이라는 이름을 단 펀드는 단 1건도 없다. 그러다보니 사이버 보안 산업을 대상으로 한 민간 투자금의 유입도 미미하다. 지난해 5월 과기정통부, 벤처기업협회가 발표한 '2022년 ICT(정보통신기술) 분야 벤처캐피탈 투자 동향' 자료에 따르면 ICT 업종 전체 투자자금(3조1438억원) 중 패키지·게임 소프트웨어에 투자된 자금이 2조152억원에 달했고 정보통신·방송(7005억원) 전자부품(3177억원) 등 분야에도 주로 자금이 투자됐다.
반면 사이버 보안 산업에 대한 투자는 찾아볼 수 없다. 게임이나 아웃소싱, 의료, 모빌리티, 자율주행 등 유행을 타는 분야에만 자금이 몰릴 뿐 사이버 보안은 투자 대상에서 소외돼 있다는 얘기다.
정책자금에서의 소외와 민간 투자의 외면으로 사이버 보안 산업의 영세성은 심화돼 왔다. 국내 정보보안 669개 기업 중 2005년 이전, 즉 설립 이후 현재까지 업력이 18년 이상이 되는 기업의 비중은 50.8%에 이른다. 그런데 이중 자본금 10억원 미만 기업 비중은 73.5%에 이르고 50억원 미만 중소기업까지 더한 비중은 93.2%에 달한다. 정보보안 기업의 90% 가량이 비상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내 정보보안 산업은 비상장 영세 중소기업 위주로 구성된 업종인 셈이다.
이들 669개사의 2021년 한 해 매출은 4조5497억원, 같은 해 글로벌 정보보안 시장 전체 규모(약 177조원)의 2.6% 수준에 그친다. 미국(40.9%) 중국(7.5%) 영국(6.5%) 일본(5.4%) 독일(5%) 등에 비해 크게 뒤쳐지는 수준이다. 1개사당 평균 매출은 불과 68억원, 같은 해 코스피 상장사 595개사의 연결매출 평균치(3조2249억원)는 물론이고 코스닥 상장사 1048개사의 매출 평균치(1762억원)에 크게 못 미친다.
실제 올들어 생성형 AI 등 출현에 따른 기술 고도화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국내 정보보안 기업 10곳 중 7곳 가량이 자금조달 어려움으로 인해 기술개발을 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지난해 9월 발간된 정보보호산업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정보보안 기업 669개사 대상 조사에서 '기술 개발시 가장 큰 애로사항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자금조달'이라고 답한 이들이 40.8%로 가장 많았고 △'인력확보 및 유지'(28.7%) △'기술정보 부족 및 획득 곤란'(13.8%) △'신기술의 짧은 수명주기'(12.2%) △'연구설비 기자재 부족'(4.4%) 등 답변이 뒤를 이었다.
이 중 '인력확보 및 유지' 항목도 결국은 자금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았다는 데서 비롯된 문제다. 사실상 '자금조달 어려움' 때문에 기술을 개발하기 어렵다고 답한 기업의 비중이 69.5%에 이른다는 얘기다.
이에 업계에서는 사이버 보안 전용 정책펀드의 조성을 호소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영세한 규모로는 AI 등 딥테크를 활용한 보안 기술 선도화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책펀드의 투자가 이뤄진다는 것은 정부가 해당 산업을 육성·지원하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것인 만큼 민간에만 의존했을 때에 비해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황국상 기자 gshwa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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