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탈원전하는 사이...러·中, 세계 원전 수출 80% 장악
한국이 탈원전에 나서고, 미국과 유럽이 원전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사이 러시아와 중국이 원전 수출 시장의 80%를 장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경련은 3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출신인 박상길 법무법인 광장 전문위원(박사)과 공동 연구한 ‘한미 원자력 민간 협력방안’ 보고서를 내고 “세계 수출 원전 시장을 러시아와 중국이 장악하고 있으며, 원전 수출 시장이 패권 경쟁 양상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동맹국인 미국과 선진 원전 수출, 원전 연료 공급망 구축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러시아·중국, 자금조달까지 지원하며 원전 수출
지난해 기준 전세계 13개국에서 건설 중인 수출 원전(타국으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아 건설중인 원전) 34기 중 러시아가 건설하는 비중은 23기로 전체의 약 68%를 차지했다. 러시아(23기), 중국(4기), 대한민국(4기), 프랑스(3기)로 러시아와 중국을 합치면 80%에 달했다. 러시아는 국영기업인 ‘로사톰’(전신은 연방원자력에너지청으로 2007년 국영 전환)의 강력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원전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로사톰은 원전 건설뿐만 아니라 자금 지원, 우라늄 농축, 운영 및 유지보수 등 모든 옵션을 ‘원스톱 패키지’로 묶어 제공한다. 로사톰은 원전 건설·운영·연료공급·기술지원을 매개로 43개국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은 3대 국영기업인 CNNC(China National Nuclear Corporation), CGN(China General Nuclear Power Group), SPIC(State Power Investment Corporation)중심으로 원전을 수출중이다. 러시아에 비해 후발주자지만, 거대한 국내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한 규모의 경제,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강력한 해외 진출 정책에 힘입어 자체개발한 원전인 ‘Hualong One’을 파키스탄에 이어 최근 아르헨티나에까지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파키스탄과 아르헨티나에 총 건설비용의 약 80%를 초장기·저금리 자금으로 지원했다.
또 카자흐스탄과는 우라늄 협약을 맺어 국내외 원전 확대를 위한 안정적인 원전 연료 공급망 기반 구축에도 착수했다. 카자흐스탄은 세계 우라늄 매장량의 약 15%를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우라늄 생산량의 45%를 담당한다.
중국은 작년 기준 약 55GW 규모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고, 2030년까지 계획한 추가 원전(약 50GW)이 완공되면, 미국(95GW)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원전을 보유한 국가가 될 전망이다.
중국이 원전 수출 시장의 신흥강자로 떠오른 시기는 일본 후쿠시마 사고(2011년)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독일 등 자유진영의 주요 원전 강국들이 탈원전 정책 등으로 원전 수출 역량이 크게 훼손된 시기와 일치한다.
◇미국 원전 경쟁력 약화로 “심각한 안보 위협” … 한미 원전 동맹 필요
미국의 원전 수출은 대부분 민간기업의 몫이었다. 정부의 역할은 기업이 해외에 원전을 수출할 때 핵 확산방지(non-proliferation) 기준을 충족하는지 심사하는 것에 그쳤다. 미국은 원전 연료 생산에서도 경쟁력을 상실했다. 러시아의 핵군축을 위해 1993년부터 2013년까지 20년간 진행된 ‘Megatons-to-Megawatts’ 프로젝트로 미국이 세계 우라늄 농축시장의 주도권을 러시아에 넘겨준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러시아가 약 2만개의 핵탄두용 고농축 우라늄을 희석해 생산한 원전 연료를 미국의 상용 원전에 저렴하게 공급한 사업이다. 1985년 64%였던 미국의 세계 우라늄 농축시장 점유율이 2015년 8%로 하락한 반면, 같은 기간 러시아의 점유율은 7%에서 45%로 올랐다.
하지만 최근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세계 원전 시장 잠식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고, 민간기업과 시장에만 맡겨놓았던 원전 산업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원전 산업 경쟁력을 복원시킬 전략을 마련하고 있다. 미국 의회도 올해 일련의 법안들을 발의하면서 ‘범정부’ 차원의 원전 연료를 포함한 원전 산업 경쟁력 강화 전략을 마련, 동맹국과의 원전 수출 협력 강화 등을 주문하고 있다. 법안들이 과업과 시한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만큼 법안이 최종적으로 통과되면 세계 원전 시장 리더십 회복을 위한 미국과 동맹국 간 협력 움직임이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경련은 보고서에서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이 ‘선진 원전(SMR) 제3국 수출 공동추진’ ‘원전 연료(HALEU) 공급망 공동구축’에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미국 원전 산업 경쟁력 복원의 핵심은 기존 대형원전이 아닌 SMR(소형모듈원전)과 같은 선진 원전의 개발 및 수출이다. 또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세계 원전 시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서 작년부터 ‘퍼스트’(FIRST, Foundational Infrastructure For Responsible Use of SMR Technology)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작년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퍼스트 프로그램 지원을 공식화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신규원전도입국에 SMR 도입을 위한 초기 기반 구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가나, 케냐,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10개국이 공식적으로 참여를 신청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 프로그램 지원을 공식 발표한 국가는 한국, 일본, 캐나다 3개국이다.
일본이 작년 10월 퍼스트 프로그램 추진의 일환으로 ‘위캔’ 이라는 명칭의 별도 프로그램을 개발해 아프리카 가나에서 미국과 공동으로 SMR 도입 타당성 조사 사업에 착수한 만큼, 우리나라도 원전 시공 및 운영 분야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해 미국 주도의 퍼스트 프로그램과 보완 운영할 필요가 있다.
또한 미국은 SMR의 개발 및 수출뿐만 아니라 SMR의 연료로 쓰이는 ‘핼리우’(HALEU, High-Assay Low-Enriched Uranium, 고순도·저농축 우라늄)의 안정적 확보를 에너지 및 국가 안보 확보 차원에서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SMR 개발에 필수적인 핼리우 수급도 러시아 로사톰의 원전 연료 자회사인 테넥스(TENEX)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핼리우 수급의 러시아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 내 핼리우 생산능력 강화를 위해 미국에서 IRA법이나 ‘HALEU Availability Program(2020년)’ 등과 같은 정책적 노력이 진행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미국 영토 안에서 핼리우를 공급할 수 있는 시설은 소규모 실증을 위한 연구시설을 제외하고는 전무하다.
아직 우리나라는 핼리우에 적합한 농축도의 원전 연료를 생산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 핼리우 농축시설 자체건설은 어렵지만, 미국 내 대규모 핼리우 농축시설 건설사업에 지분투자 또는 EPC 형태로 우리 기업이 참여한다면 핼리우 수급문제 해결에 있어 동맹국으로서 기여할 수 있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산업본부장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으로 우리나라 에너지・건설 분야 기업과 미국 SMR 분야 혁신기업과의 협력의 물꼬는 트인 상황”이라며,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을 견제하고 SMR을 중심으로 세계 원전 시장 위상 회복을 위해 동맹국과 협력을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우리도 실리와 명분을 모두 챙길 수 있는 액션플랜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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