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속도 빨라진다" vs "주도권 빼앗긴다"
[편집자주]대형건설기업들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여겨졌던 도시정비사업(재개발·재건축)이 골칫거리가 됐다. 일반분양 수익을 기대하고 사업에 뛰어들던 조합 입장에선 기준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거래시장이 침체돼 분담금 부담이 커졌다. 설상가상으로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폭등해 시공사들은 몇 년 만에 두 배 오른 공사비를 받아도 이윤이 남지 않는다며 수도권 일부 핵심 사업장을 제외하곤 입찰장에 나타나지도 않고 있다. 앞서 사업을 시작한 조합들은 추가 공사비 폭탄으로 공포에 질렸다. 고금리 여파로 자금 조달이 쉽지 않은 가운데 서울을 제외한 지역은 조합설립인가 이후 시공사를 선정해 지급보증을 받을 수 있지만 공사비 협상의 주도권을 빼앗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시공사 위에 군림하던 조합들이 업체에 쩔쩔매는 추세는 앞으로 수년간 지속될 전망이다.
오는 7월 서울시내 재개발·재건축사업 시공사 선정 시기가 사업시행인가 이후에서 조합설립인가 이후로 앞당겨진다. 서울시는 지난 2월 신속통합기획 적용 대상지를 포함한 시내 모든 정비사업구역에 조합설립인가 후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 조례안' 일부 개정안을 시의회에 상정, 한 달 뒤인 3월에 본회의를 통과했다.
서울시내 정비사업은 '정비구역 지정→안전진단(재건축)→조합설립인가→사업시행인가→시공사 선정→관리처분계획인가→이주·철거→준공'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조합이 시행하는 정비사업에서 시공사 선정시기는 2009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 개정을 통해 조합설립인가 이후로 결정됐다.
예외적으로 서울시는 2010년 관할 구청장이 정비구역 지정 시점부터 조합설립추진위원회 구성과 승인까지 관여하는 '공공관리제도'를 도입하면서 재건축 시 시공사를 사업시행인가 후에 선정하도록 했다. 인·허가나 설계 등 어느 정도 큰 틀이 정해진 상태에서 시공사를 정함으로써 각종 비리와 무리한 설계변경으로 인한 사업지연을 막기 위해 생긴 규정이란 게 서울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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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계는 조합설립인가 후 시공사를 선정하면 사업추진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관계자는 "조합은 상품설계 관련 전문성이 낮고 시공사 선정 전까지 건축설계사 등 협력업체에 대금을 지급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 시공사 선정 후 중대한 규모의 설계변경과 인·허가 변경을 거쳐 품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시공사가 조기에 선정되면 초기부터 고품질의 설계안을 제작함으로써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였다.
사업시행계획과 사업비 조기 확정이 가능해져 공사 중단이나 입주 리스크도 줄어든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최근 공사 중이거나 입주 시점에 공사비 증액 관련 분쟁이 늘었다. 올 초 서초구 반포동 '반포래미안 원베일리' 시공사인 삼성물산이 조합에 1560억원의 공사비 증액을 요구하며 사업이 중단될 위기에 처했으나 극적으로 합의했다. 양천구에 위치한 '신목동파라곤'의 경우 입주 당일 공사비 문제로 시공사인 동양건설산업이 열쇠를 주지 않으면서 조합원과 일반분양자 모두 50여일 간 곤욕을 치렀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원자재 가격 상승 외에 2019년 도입된 공사비 검증제도도 존재한다. 통상 공사비 검증 준비부터 결과 통보까지 총 10개월 내외의 시간이 소요된다. 공사비 증액 관련 본격적 협상 시기가 늦어지는 탓에 입주 직전 혹은 입주 시작 후에도 공사비 분쟁을 벌이게 된다.
그렇다고 시공사 조기 선정에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조합설립인가 후엔 정비계획(도시계획)만 확정될 뿐 건축설계나 관련 인·허가에 대해 결정된 사항은 없다. 이 시점에 시공사 입찰을 진행하면 건축계획과 세부 조건들의 편차가 크고 구체성이 낮아 건설사업을 잘 모르는 조합원들이 시공사 제안 조건의 유불리를 판단하기 어렵다. 결국 실질적인 조건보다 제안서의 퀄리티나 특정 시공사의 자체 아파트 브랜드 가치 등을 중심으로 선정될 우려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내역입찰이 아닌 총액입찰 방식으로 계약을 체결했다면 공사비 증액 적정성 검토 역시 쉽지 않다. 내역입찰이란 입찰 시 총액을 기재한 산출내역서를 첨부해 입찰하는 방식으로 입찰 시 총액만 적어 입찰서를 제출하는 총액입찰보다 입찰비용이 많이 들고 계약적 구속력을 지닌다. 총액입찰 시 설계도서와 상세내역서가 미완된 시점에 시공사를 선정하기 때문에 향후 설계변경 시 공사비가 대폭 늘어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조합원의 몫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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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서울시 제안대로 개략적인 도면을 활용해 구체적인 설계도서와 내역서를 제출하면 시공사로선 입찰 시점과 실제 착공 시점 사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단가 차이와 입찰 후 변경되는 설계에 따른 물량의 불확실성, 입찰 자체의 비용 증가 등 삼중고를 부담해야 한다.
그렇다고 설계안이 상당 부분 작성된 이후 시점에 시공사를 선정하면 시공사 조기 선정의 장점이 사라지기 때문에 제도 도입 취지 자체가 무색해진다는 게 정비업계 주장이다.
정비업계는 현재 서울시 제안대로 시공사를 사전에 선정할 경우 입찰 자체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업체가 늘어 단독입찰 구역이 늘거나 경쟁 회피로 인한 대규모 유찰이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정비업계 관계자는 "지금처럼 건설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 정비사업에 진입하는 시공사의 부담분이 늘어난다면 오히려 사업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려는 경향이 늘 것"이라고 했다.
조합들 반응은 상황에 따라 다소 엇갈린다. 우선 사업에 속도가 붙는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를 환영하는 조합도 있다.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한 아파트 재건축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시공사 선정이 빨라지면 사업에도 진척이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사업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되는 조합의 경우 이번 조치를 반가지 않는 분위기다. 서울시내 한 조합 관계자는 "시공사들은 더욱 돈이 되는 현장을 찾아 선별적으로 수주에 나설 텐데 이 경우 유찰 비율이 늘지 않겠냐"며 걱정을 표했다.
전문가들은 시공사 조기 선정에 따른 이점을 살리고 문제점 보완을 위해선 정비계획부터 공사발주와 계약 내용 전반을 아우르는 입체적 제도보완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태희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현재 서울시가 검토하는 방안처럼 사업 초기 단계에 시공사에 구체적인 설계안과 계약 구속력을 지닌 내역서 제출을 요구한다면 시공사 간 경쟁 촉진을 통한 조합원의 편익을 높이기 위해 적절한 수준의 설계보상금을 지급하고 입찰 이후 물가 변동에 따라 계약금액이 조정될 수 있도록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의 설계-시공 분리발주 방식은 정비사업의 특성에 잘 맞지 않는 면이 있다"며 "과도한 공사비 증액 위험을 낮추고 사업 속도를 향상하는 등 새로운 발주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영희 기자 chulsoofriend@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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