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우리 땅 걷기] 춘삼월 지리산 천왕봉서 상고대에 취하다
봄이 되면 전국은 꽃향기로 물들기 시작하지만 전국의 국립공원은 봄철 산불조심기간을 운영해서 꽃피는 봄에는 국립공원을 탐방하기 쉽지 않다. 다행히 지리산의 중산리-천왕봉 코스는 제외된다. 구례, 하동의 벚꽃 소식도 궁금하고 천왕봉에 올라 제석봉, 연하봉, 촛대봉, 뱀사골, 반야봉, 노고단으로 미끄러지듯 펼쳐지는 주능선도 보고 싶던 차에 지리산 천왕봉 등산이 정해졌다.
다양한 코스 중에서도 주봉인 천왕봉까지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중산리코스로 정했다. 무박으로 이른 아침부터 산행을 시작하면 당일 산행으로 끝나겠지만 지리산의 정기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 중산리에서 1박을 하고 천왕봉에 오르기로 했다.
'3월인데 아이젠 필요할까'는 착각
토요일 오후,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이용해 중산리까지 이동하니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서 생각보다 날씨가 상당히 춥다. 날씨가 흐리니 일출산행은 이미 마음에서 접었다. 내일 산길이 얼어 있지나 않을지 조금 걱정되지만 아이젠이 필요할 정도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따스한 잠자리 덕분에 숙면을 취하고 산행준비를 마쳤다. 식당으로 내려가니 마치 집밥처럼 정성 가득한 식탁이 차려져 있다.
예전에는 중산리 탐방지원센터부터 산행을 시작했지만 요즘은 두류동에서 산행들머리인 환경교육원(순두류)까지 이동하는 버스를 이용한다. 임도로 걸어야 할 3.2km를 버스로 10분 정도 이동하니 체력 비축에 도움이 된다. 이 버스 덕분에 순두류에서 천왕봉까지의 최단거리 산행은 지리산 산행 코스 중에서 인기 최고이다. 당연히 손님은 대부분 등산객이다.
오늘 산행코스는 순두류~로타리대피소~천왕봉~제석봉~칼바위~중산리로 원점회귀할 예정이다.
순두류에서 천왕봉까지 거리는 4.4km. 첫 목표지점은 로타리대피소, 버스를 내린 곳에서부터 2.7km이고 난이도는 보통이다. 각자의 진행속도가 달라서 선두로 도착하면 로타리대피소에서 쉬면서 후미를 기다리기로 했다.
안개가 심한 아침. 마치 꿈속의 세상 같다. 시간이 충분해서 천천히 편안하게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 처음엔 꽤 추웠는데 오르막이 계속되니 몸이 더워진다.
계곡 물소리가 우렁차다. 가뭄이라고 전국이 아우성인데 지리산이 크고 깊은 산임은 확실하다. 1,000m 이상의 고도에서 자라는 조릿대 군락지를 지나 고도가 높아지니 찬 기운도 조금 강해지지만 코끝을 스치는 싸늘한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저 아래 세상은 꽃이 만발했는데 계곡은 아직도 겨울이다. 상류는 눈, 하류는 눈이 녹아서 꽐꽐 쏟아지는 계곡물.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피로가 다 씻겨 내린다.
출렁다리를 3개나 건너서 그리 어렵지 않게 로타리대피소에 도착했다. 많은 등산객들이 이곳에서 쉬면서 식사도 한다. 화기에서 펄펄 끓는 라면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준비한 점심 도시락은 장터목대피소에서 먹기로 하고 간식만 조금 먹는다. 나의 경우 오름질이 심한 구간에서 많이 먹게 되면 오히려 힘이 들어서 배고프지 않게 자주 조금씩 먹어서 에너지를 보충해 주는 편이다.
오랜만에 왔으니 법계사로 향한다. 법계사의 해발고도는 1,400m,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다. 부처님 진산사리를 모셔놓은 적멸보궁과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삼층석탑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니 삼층석탑 앞 운해가 장관이다.
로타리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2km, 검정색이 칠해져 있다. 검정색은 '매우 어려움'이다. 몇 번이나 다녔던 구간이지만 역시나 긴장이 된다.
개선문까지 이르는 구간은 끝없이 계단이 이어진다. 산에서 제일 피하고 싶은 계단이다. 차라리 암릉이 좋다. 개선문에서 천왕봉까지는 단 800m이다. 해발고도 1,700m. 이곳에서 흔들리는 돌을 고정시키는 분을 만났다. 아마도 자원봉사자이신 듯하다. 이런 분들의 보이지 않는 손길 덕분에 안전하고 즐겁게 산을 다니고 있다. 마음속으로만 '감사합니다'를 되뇌다가 지나쳐서 산행 내내 후회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천왕봉이 바로 위에 있다. 천왕봉 정상석 앞에는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다. 드디어 천왕봉 도착. 사람들이 많아서 일단 정상석 아래쪽에서 셀카 사진을 남겼다.
봄 상고대, 겨울보다 투명
정상 주변을 한 바퀴 돌다가 정말 깜짝 놀랐다. 장터목으로 내려가는 길에 상고대가 가득하다. 날이 추워도 춘삼월 봄인데 이렇게 예쁜 눈꽃이 기다릴 거란 상상은 전혀 못 했다.
지리산 산행 전에 함께 산행하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무리 추워도 3월 말인데 아이젠까지는 준비하지 않아도 좋을 거라 했는데 갑자기 조금 긴장이 된다. 장터목으로 가는 길의 상태는 괜찮을까? 한라산도 폭설로 아이젠이 없어서 산행하지 못했던 것이 불과 2주 전인데. 큰 산에 갈 때는 안전산행을 위해 날씨, 준비물 등 철저히 체크할 필요가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봄에 맺힌 상고대는 겨울보다 더욱 선명하고 투명하다. 꽃이 만발하는 삼월 말에 상고대가 만발했으니 이보다 더 귀한 풍경이 어디 있을까?
천왕봉에서 제석봉으로 펼쳐지는 능선길은 한쪽은 숲이고 다른 한쪽은 상고대이다. 마치 미완성 그림 같다. 하산하면서도 상고대는 여전히 눈을 즐겁게 해준다. 홀로 서있는 고사목은 사진 찍는 이들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하늘로 올라가는 길목, 통천문. 이승과 저승의 경계. 그래서인지 통천문에 이르니 바람소리가 엄청나다. 내려가는 쇠사다리는 장갑을 꼈는데도 손이 시리다. 경사도가 심해서 교차 통행으로 다니기엔 다소 위험하다. 감사하게도 아래에서 올라오는 분이 기다리고 계신다.
통천문을 지나서 하늘 아래 첫집이라 불리는 장터목대피소. 장터목이란 명칭은 산청군 시천면 사람들과 함양군 마천면 사람들이 물물교환과 물건을 이곳에서 사고팔았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1971년 40명을 수용하는 지리산산장으로 시작해서 1997년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장터목대피소로 변신했다. 이곳 해발고도는 약 1,670m. 한국의 건축물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장터목대피소에서 바람은 막아주고 볕이 들어오는 따스한 자리를 골랐다. 점심 먹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상고대의 감흥이 아직 식지 않아서 시장한 줄도 몰랐다.
칼바위로 향하는 길은 급경사가 많아서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계곡에도 눈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끝없이 계단과 너덜길이 반복된다. 조릿대 구간이 나타나니 길도 조금 평이해진다. 계곡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가 칼바위 도착, 아침에 올랐던 길로 돌아왔다.
이젠 산행도 막바지. 나무들 키도 제법 커졌고 햇살도 뜨겁게 느껴진다. 한겨울 바람을 언제 맞았었는지, 상고대를 정말로 보고 내려온 것인지 정상과는 완전히 다른 계절이다. 통천길이 끝났다. 산행도 끝이 났다.
중산리탐방안내소를 지나 숙소로 향하는 길에는 어제만 해도 몽우리 맺었던 진달래꽃이 밤사이에 활짝 피었다. 신비로운 자연이다. 상고대도 진달래도 예상치 않았던 자연의 선물이 그저 감사하다.
▶산행정보
경로 : 순두류 - 로타리대피소 - 법계사 - 천왕봉 - 제석봉 - 장터목대피소 - 유암폭포 - 칼바위·중산리(약11.9km)
▶두류동~순두류 버스
주말엔 첫차가 오전 7시, 평일은 첫차가 오전 8시이다. 소요시간은 10분, 요금은 2,000원. 반드시 현금으로 준비해야 한다. 손님이 많으면 수시로 운행하므로 버스정류장에서 대기하는 것이 좋다.
문의 : 두류여객(주) 010-2825-3001
▶숙소
중산리에 있는 황금능선 게스트하우스
주소 : 경남 산청군 시천면 지리산대로 482
문의 : 010-5872-4646
주차 가능, 1인 숙박 요금 3만5,000원, 아침식사 8,000원, 산행 도시락 6,000원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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