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간 기후법정에 선 ‘법’[오늘을 생각한다]

2023. 5. 3.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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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증인이 있다. 그는 아름다운 맹방 해변을 뛰어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꿈을 찾아 도시로 떠났다. 수십년이 지나 돌아온 고향의 풍경은 그러나 볼썽사납게 망가져 있었다. 석탄화력발전소를 짓고 있기 때문이라 했다.

여기 또 한명의 증인이 있다. 그는 하재마을을 지켜온 600년 된 팽나무를 대신해 법정에 섰다. 백합과 소라를 잡는 것으로 생계를 넉넉히 유지할 수 있어 무려 2000명이 살던 마을은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황폐해져 이제는 터만 남았다. 마을 앞바다는 죽은 바다가 됐다.

마지막 증인은 보령 갓배마을에 집단적으로 발생한 암 환자들을 위해 증언한다. 마을 옆에 들어선 미군기지로부터 날아드는 화학물질과 중금속으로 바다의 생물들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시름시름 앓고 있다.

세상의 법정은 이들에게 권한, 즉 ‘권리’가 없기 때문에 법정에 설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광주 비엔날레 네덜란드 파빌리온에서 열린 세대 간 기후법정은 이들의 이야기를 청취한다. 더 나아가 그들이 지목한 가해자인 정부와 기업에 유죄를 선고한다. 이 법정에는 또 다른 피고인이 있다. ‘법’ 바로 그 자체다. 법은 불평등의 극대화와 기후변화라는 이 시대의 위기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못했다. 법은 이를 규탄하는 활동가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이를 야기한 기업은 벌하지 않는다.

법이 현시대의 문제해결에 기능하지 못할 때 법 또한 단상에서 끌어내려 심판할 수 있고, 새로운 법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세대 간 기후법정의 취지다. 인류의 역사 또한 그렇게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연중 ‘권리’를 신성하게 여긴다. 그러나 법전에 주거권이나 환경권이 있다고 하여 오늘날 더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주거권을 누리는 것도, 더 깨끗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법전에만 박제된 권리를 얻는 대가로 투쟁할 의지를 잃는다. 법의 또 다른 모순은 ‘법인’도 사람에 준하는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다. 법은 실존하는 도롱뇽이 권리를 누릴 수 없다고 당연한 듯 말하지만, 실체가 없는 법인은 손쉽게 권리를 갖는다. 재산권에서 시작한 법인의 권리는 끝도 없이 확대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있고, 개인정보를 열람할 권리도 있다. 사람이 갖는 권리와 달리 법인의 권리는 힘이 있다. 그로 인해 모순된 일이 발생한다. 마을에서 평생을 일궈온 주민들은 재산권이 없기 때문에 오염에 대해 그 어떤 주장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땅 위에 공장을 지은 법인은 하늘을 검게 물들일 권리가 있고, 지구를 더 뜨겁게 달굴 권리가 있다. 법이 이를 용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법은 유죄다.

지현영 녹색전환연구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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