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천운’에 맡기는 지하철 출퇴근… 화재 발생시 대형참사 [밀착취재]
“서로 밀어 아찔한 상황 목격 잦아… 귀가 후 구토”
동선관리 미흡에 시민의식 부재로 사고 위험 키워
역사 내 방독면 태부족… 불 나면 대형참사 우려도
日, 지하철 화살표로 동선유도 병목현상 방지 노력
도쿄역에선 역무원이 직접 마이크 들고 ‘안전 지도’
#2. “뭐하는 짓이야!” 지난달 24일 오전 8시 인천 부평구 서울지하철 7호선 부평구청역에서 고함이 울렸다. 열차 문이 열리자마자 인천지하철 1호선과 연계되는 환승통로를 향해 오픈런이 벌어지면서 먼저 가려던 두 사람이 어깨를 크게 부딪쳐 인파 속에서 넘어질뻔한 것이다. 자칫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 때와 같은 대형 압사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20대 여성은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전국의 지하철, 도시철도에서는 시민의 발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오늘도 시민의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출퇴근 시간대의 혼잡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정부·지방자치단체의 대응 부족과 시민 각자의 안전의식 부재 속에서 무사 귀가는 천운(天運)에 맡겨야 하는 듯한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 도시철도의 살인적 혼잡은 전국적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오전 대전지하철 1호선 시청역. 열차가 멈춰 서자 질서있는 승하차는 실종되고 하차 승객과 탑승 승객 수백 명이 서로 뒤엉키면서 삽시간에 난장판이 됐다. 일부 승객은 다른 승객을 밀면서 몸을 열차에 욱여넣기까지 했다.
대전 정부청사역도 마찬가지. 하차 승객이 파도처럼 출구에 몰리자 병목현상이 발생하면서 거대한 혼잡이 벌어진다. 대전정부청사로 출근하는 박모(31)씨는 “출퇴근 때마다 서로 밀쳐 아찔한 상황이 목격된다”고 우려했다.
전국 지하철, 도시철도의 혼잡도는 심각하다. 혼잡도 100%는 좌석과 입석 승객이 꽉 찬 상태다. 100%를 넘기면 정원을 초과했다는 뜻이다. 3일 공공데이터포털에 따르면 서울의 경우 출퇴근 시간대 지하철 1∼9호선 모두 혼잡도 100%를 넘겼다. 오전 8시의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와 9호선의 노량진역은 정원에 2배 가까운 승객이 탑승한 혼잡도 185%를 기록했다. 9호선에서 만난 김모(31)씨는 “특히 급행열차를 타는 건 전쟁 수준”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모(27·여)씨도 “출퇴근길에 여의도역에 사람이 너무 많다. 퇴근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구토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수도권인 환승역인 인천지하철 1호선의 부평역, 원인재역과 2호선의 검암역, 석남역도 혼잡도가 심각하다.
혼잡문제가 시민안전을 위협하자 혼잡도 완화를 위한 대책이 나오고 있으나 실효성에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서울교통공사는 3월부터 지하철 2·3·5호선 운행을 오전 2회, 오후 2회씩 총 4회 증회하고, 서울시메트로 9호선은 내년 초 6칸짜리 신규 열차 8편을 추가로 투입하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평가가 나온다.
예산·인력 문제로 열차 운행을 한없이 늘릴 수만은 없는 데다 혼잡도가 극심한 구간은 기본적으로 거주·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혼잡도를 획기적으로 낮추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부·지자체·운용기관의 대책이 열차 내 혼잡도 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열차에서 내린 뒤 역사(驛舍) 내에서의 안전위협도 가볍게 볼 수 없다. 역사 관리기관의 동선(動線)관리 부실과 승객의 시민의식·안전의식 부재가 위험을 키우고 있다.
지난달 26일 오후 5시30분쯤 찾은 서울 영등포구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에선 역사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인파에 휩쓸렸다. 퇴근 시간을 맞아 열차를 타러 역사로 들어가는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하차 후 나오는 사람을 압도해 반대 방향 보행로를 차지해 버렸다. 개찰구도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에게 휩쓸려 반대편 쪽에서 나오려는 사람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이기 일쑤였다. 벨트 분리대나 가로분리봉으로 승객의 동선을 유도하는 설비는 전혀 없었다.
우측통행과 같은 기본적 원칙을 지키지 않고 스마트폰을 보며 걸어가는 스몸비족(스마트폰+좀비)이나 뛰어다니는 사람도 있다. 한 명만 넘어져도 인간붕괴 사태를 불러 대형사고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부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지난달 24일 오전 부산도시철도 1호선과 3호선의 환승역인 연산역 개찰구에선 한꺼번에 빠져나가려는 승객들로 인해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에스컬레이터와 승강기(엘리베이터)도 북적였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길을 걷는 승객이 적지 않았다. 역사 내에서 우측통행은 지켜지지 않았고 승객을 안전하게 유도하는 인력도 전무했다.
이송규 한국안전전문가협회장은 “역사에 안전인력 배치를 늘리는 것 같은 대책 외에도 지금 지하철이나 역사 내에서의 위험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 하는 상황인데, 직장인 대상 교육을 하고 방송 등을 통해 홍보를 더 많이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달 30일 서울에선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이 일어났다. 서울 양천구 목동 지하철 9호선 등촌역 역사 내에서 불이 나 승객이 대피하고 전동차가 역을 2시간가량 무정차 통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승객 밀도가 높은 지하철 열차 안이나 역사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대형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취재진이 살펴본 전국의 지하철 역사에는 화재 상황 등에 쓸 수 있는 긴급구호품이 비치되어 있기는 했으나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있거나 마스크(방독면), 공기호흡기 등의 숫자가 승객수에 비해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부산 1호선 연산역의 경우 정원 970명의 8량 차량이 플랫폼에 드나들지만 비상시 승객이 이용할 수 있는 화재대피용 마스크는 207개에 불과했다. 부산교통공사 관계자는 “화재대피용 마스크와 방독면이 정원 대비 많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비치 장소도 비상시에는 숨바꼭질을 해야 할 판이다. 서울 당산역에서 만난 직장인 정모(33)씨는 지하철역 내에서 긴급구호품함을 본 적 있느냔 질문에 “잘 모르겠다”며 “전광판 같은 곳에 긴급구호용품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안내하면 좋겠다”고 답했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각 역사에 비치된 화재용 마스크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100%까진 아니더라도 역사 이용객 평균치만큼은 확보해 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공 교수는 이어 “또 다른 문제는 착용법이 너무 복잡해서 마스크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라며 착용이 편한 신품으로 교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정우 숭실대 안전융합대학원 교수는 “안전에 관한 관점 자체가 ‘최소’가 아니라 ‘최선’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큰 사고 1건이 터지기 전 29번의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300번의 징후가 나타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우리도 이제 정적인 위험 요인 외에도 동적인 요인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도·지하철대국 일본에서는 어느 역을 가나 승객 안전을 위한 당국·철도노선 운용기업의 동선 확보 조치와 시민 각자의 공공의식이 거대한 인파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지난달 24일 오후 찾은 도쿄의 관문 역 중 하나인 시나가와(品川)역. 역사(驛舍) 바닥 전체에는 화살표로 승객의 안전한 흐름을 유도하고 시민도 화살표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화살표 등 각종 눈에 잘 띄는 부호를 역사 바닥이나 벽에 표시해 시민의 안전한 이동을 확보하는 것이 일본 역사의 가장 큰 특징이다.
시나가와역 인근 오사키(大崎)역에는 퇴근시간대가 되자 가로분리봉이 설치돼 승객이 한 줄로 이동하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플랫폼으로 승객이 일시에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지하철·철도 운영사들은 플랫폼과 열차 내부에도 다양한 안전장치를 갖추고 있다. 같은 날 오후 5시쯤, 신주쿠선(線) 아케노바시(曙橋)역 플랫폼에서 마이크를 든 역무원이 열차의 진입을 알리며 퇴근 시간이 다가와 조금씩 늘고 있는 이용객에게 안전한 이용을 당부했다. 역무원이 서 있는 홈도어(스크린도어)에는 이용객의 선로 추락 등 비상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버튼이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빨간 색 문구가 선명했다. 열차와 플랫폼 사이의 간격이 커 발 빠짐 등의 사고 발생 가능성이 큰 곳에는 그 간격을 메워주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실제 추락 사고가 발생할 경우 이를 신속하게 감지할 수 있는 매트를 선로 한쪽에 깔았다. 선로로 떨어진 사람이 열차를 피해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 플랫폼으로 올라오는 것을 쉽게 하는 발 받침대 같은 구조물을 설치한 곳도 있다.
열차 내부에도 비상 상황시 승무원과 바로 연결할 수 있는 버튼이 쉽게 눈에 띈다. 사고 발생 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세심한 조치들도 있다. 사고 발생시 좌석 양 끝자리에 앉은 승객이 튕겨 나가 크게 다친 사례가 많다는 점을 감안해 큰 칸막이를 설치하거나, 손잡이 색을 눈에 잘 띄는 오렌지색으로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김주영·윤준호 기자, 인천·대전·부산=강승훈·강은선·오성택 기자, 도쿄=강구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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