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찾는 G7 정상, 한국인 원폭 피해자 목소리 들어달라”
미국·일본 사과한 적 없어
지난달 26일 방문한 일본 히로시마 나카구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엔 단체로 견학을 온 일본 중·고등학생과 외국인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곳을 방문하면, 지금부터 78년 전인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미국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사용한 원자폭탄 ‘리틀보이’의 참상을 보여주는 전시물을 만날 수 있다. 무거운 마음으로 관람객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인류가 원폭 투하를 통해 저지른 참상을 보여주는 히로시마가 다시 세계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21일 이곳에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히로시마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지역구가 자리한 곳이기도 해 일본 정부는 주요 7개국 정상들의 자료관 견학은 물론 원폭 피해자들과 직접 만남을 추진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은 7년 전인 2016년 5월 이곳을 방문해 연설 뒤 피폭자들과 비공식적인 짧은 만남을 가진 바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피폭자들과 별도 자리를 만들어 대화한다면 원폭을 떨어뜨린 미국 대통령과 피폭자들 간의 사실상 첫 공식 만남이 된다.
하지만,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이들 가운데는 일본인만 있었을까. 복잡한 마음을 안고 정상들이 방문할 자료관을 살펴보던 중 ‘고향을 떠난 땅에서’라는 전시물에 시선이 멈췄다. ‘다리를 다친 조선 여성’이란 제목의 그림 밑에 적힌 설명에 눈길이 갔다. “원폭은 국적이나 민족 구분 없이 모든 사람들을 덮쳤다. 당시 히로시마에는 조선반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을 비롯해 대만이나 중국대륙에서 온 사람들, 일본계 미국인 등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는 징병이나 징용된 사람들도 포함돼 있다.”
바로 옆 전시에는 곽귀훈(1924~2022)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명예회장의 사진과 피폭 사실이 간단히 적혀 있었다. “조선에서의 징병 실시에 따라 1944년 9월 히로시마 부대에 배속됐다. 폭심지로부터 약 2000m 지점에서 복무 중 피폭돼 머리와 등에 심한 화상과 부상을 입었다.” 한국에서 살던 곽 회장은 원폭 피해자가 일본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했더라도 ‘피폭자는 어디 있든 피폭자’라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가 똑같이 수당 등을 지급해야 한다고 치열한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 승소를 끌어낸 인물이다.
피폭이란 참상을 겪은 이들이 일본인만이 아니라는 이 전시물은 2019년 4월 자료관을 새롭게 단장하면서 추가된 내용이다. 이전보다 진일보한 것은 맞지만 왜 수많은 조선인·한국인들이 히로시마에서 피폭을 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나 아시아 침략 등의 역사적 진실과 마주하고 반성하며 성찰하려는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일본의 현실과 함께 살아온 원폭 피해자 1세들은 착잡하다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김진호(78) 히로시마현 조선인피폭자협의회 회장은 “왜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미군이 투하한 핵폭탄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는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이런 비참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일본과 미국은 원폭 피해 조선인에게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자료관 전시에는 이런 내용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 김 회장은 나아가 전시돼 있는 곽 회장의 판결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과 여전히 미수교 상태인 북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북한의 피폭자는 (일본과) 수교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껏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인권적인 처사”라고 말했다.
한반도는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곳이다. 한국 쪽에선 1945년 8월 당시 히로시마에 살던 조선인 약 8만명 가운데 5만명가량이 피폭을 당했고, 이 가운데 3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한 피해 규모는 지금껏 알 수 없어 논란이 이어진다. 자료 소실 등으로 실태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시는 일본인 피폭자 희생자 수가 약 14만명이고 이 가운데 한반도 출신 사망자는 5천~8천명이라고 추계하고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지난 방문에서 한국인 피해자를 언급하며 ‘수천명의 한국인’으로 표현했다. 그로 인해 한반도 출신 원폭 피해자들이 큰 상처를 입었다.
해방 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히로시마에 남은 동포들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 원폭 피해자라는 ‘낙인’에 지독한 ‘가난’이라는 3중고 속에서 통한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피폭으로 원인 모를 질병에 고통을 겪는 피해자들도 많았다. 원폭 피해자 2세인 권준오(73) 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로시마본부 원폭피해자대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과 전혀 상관도 없는 한반도 출신 수만명이 원폭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주요 7개국 정상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 피해자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한반도 출신 피폭자는 일본에 있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라는 이중성을 드러나게 하는 존재입니다. 일본 정부가 (19일 만남에) 참여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지난 경험을 통해 배운 현실이기도 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인 피폭자도 만나게 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주요 7개국 정상회의엔 윤석열 대통령도 초대를 받았다. 한국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 대통령이 한-일 관계 핵심 현안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에서 일방적인 양보안을 제시한 가운데 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서도 한국인 피폭자 문제가 배제될 경우 한-일 관계 개선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히로시마에서 만난 이들은 7~8일 서울에서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에서 윤 대통령이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기시다 총리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나카타니 에쓰코(73) ‘한국 원폭피해자를 구원하는 시민모임’ 히로시마 지부장은 “주요 7개국 정상들이 원폭의 참상을 알기 위해 한반도 출신 피해자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히로시마에서 한·일 정상이 만나 원폭 피해자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해주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일본의 직접 사과가 있어야 합니다. 한·일이 함께 한반도 출신 원폭 피해자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시급한 문제이지요.”
히로시마/김소연 특파원
dandy@hani.co.kr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원폭 피해자 왜 많았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조선인 피폭 피해자들이 많았던 이유는 이 두 도시가 일본의 대표적 군수도시였기 때문이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2010년 펴낸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에 대한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히로시마의 조선인 인구는 1930년 7189명에서 1945년 8만4886명까지 증가했다. 나가사키도 같은 기간 4944명에서 6만1773명까지 늘었다.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사변과 1937년 7월 중일전쟁으로 15년에 걸친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 직후인 1938년 국가총동원 체제가 구축돼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조선인 강제동원이 시작됐다. 결국 1945년 8월6일 히로시마,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고 조선인은 각각 3만명, 1만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그동안 이뤄진 폭격의 피해를 덜 입은 군수도시를 원폭 투하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 해군의 중심지였던 히로시마엔 미쓰비시중공업 히로시마조선소, 동양공업주식회사, 히로시마 항운주식회사 등이 있었고, 나가사키엔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 등이 있었다. 미군이 가장 마지막으로 표적으로 삼은 도시는 히로시마·고쿠라·니가타·나가사키였다.
히로시마/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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