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의 늪'에 빠진 퍼스트리퍼블릭, 금리 인상에 쓰러져

박종원 2023. 5. 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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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퍼스트리퍼블릭, 예금이자 줄이고 대출이자 높여 성공
이자에 덜 민감한 부유층 예금주 집중 공략, 맞춤형 서비스로 승부
美 금리 인상 계속되자 예금주 이탈...이자 비용 증가하며 재정난
SVB와 자산 구조 비슷, 3월 은행 위기 전염 못 피해
1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퍼스트리퍼블릭은행 지점에서 한 시민이 파산 공고문을 읽고 있다.AFP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고객들은 우리와 함께한다. 그들은 더욱 부유해지면서 예금을 늘리고, 대출을 늘리고, 친구들을 데려온다. 이건 복잡한 사업 모델이 아니며 모든 환경에서 작동한다."
미국 상업은행 자산 순위 14위였던 퍼스트리퍼블릭은행(FRC)의 짐 허버트 회장은 지난해 11월 투자자들과 만나 이렇게 자신했다. 그러나 은행은 고객들의 대량 예금인출(뱅크런)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 1일(현지시간) 파산했다. 부자들의 예금으로 일어섰던 은행은 금리 인상의 흐름을 읽지 못해 결국 예금 이탈로 무너졌다.

예금 확보에 사활 걸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일 보도에서 FRC가 고객 관리를 최우선으로 두며 예금 확보에 사활을 거는 사업 모델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올해 78세인 허버트는 지난 1985년에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FRC를 창업했다. 그는 사업 초반에 사업가 고객들을 적극 유치하며 주택담보대출로 돈을 벌었다. 은행은 지난해 기준으로 84개 지점과 9개 대출 전용 지점을 비롯해 11개주에서 93개 지점을 운영했다.

허버트는 예금주에게 최대한 이자를 적게 주면서 대출 금리를 높여 차익을 노렸다. 그는 주택담보대출과 더불어 뉴욕의 콘도, 하와이의 별장 건설 사업 등에 돈을 빌려주며 이익을 챙겼다. FRC의 평균 대출 이자는 2021년 기준 3.03%였으나 예금 이자는 평균 0.12%에 불과했다.

이러한 수익 구조가 작동하려면 예금주들이 적은 이자를 받으면서도 은행에 머물러야 했다. 허버트는 부유층이 예금 이자보다 은행에서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에 더 민감하다고 판단하고 맞춤형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며 부자들의 예금을 노렸다. 지난해 FRC와 거래를 시작한 한 고객은 WSJ를 통해 은행에서 2.95% 이율로 10만달러(약 1억3410만원) 개인 대출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그는 은행에 일본 여행을 간다고 했더니 집 앞까지 수천달러어치 일본 엔을 수수료 없이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동시에 은행은 고객 잔고가 2만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개인 대출 금리를 올려 예금 이탈을 막았으며, 당좌예금계좌를 새로 열어 주택담보대출을 갚으면 금리를 깎아주기도 했다.

또 FRC는 대기업 직원들을 유치하기 위해 구글 직원들에게는 2000달러 이상의 계좌 개설시 보너스를 제공했다. 페이스북 본사에도 지점을 열어 부유한 직원들에게 2.5%를 밑도는 장기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2012년에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였던 마크 저커버그 역시 FRC에서 1.05% 개시 금리로 595만달러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FRC의 사업 방식은 미국의 기준금리가 0%에 가까웠던 초저금리 시대에는 잘 작동했다. 은행의 연간 순이익은 2021년까지 10년 동안 4배로 증가했고 JP모건체이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BofA) 역시 부유층 고객 확보를 위해 부촌에 지점을 열었다. FRC는 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기준 금리를 완만하게 올렸던 2015~2018년 사이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시 연준은 금리를 0% 수준에서 2.25% 수준까지 올렸다.

갑자기 찾아온 고금리에 속수무책

연준은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부터 금리를 0% 가까이 내리고 시장에 막대한 돈을 풀기 시작했다. 증시 등 각종 위험 자산들의 시세가 치솟았으며 머니마켓펀드(MMF) 수익률도 4%에 달했다. MMF는 초단기 우량 채권에 투자하는 상품으로 원금 손실 위험이 적은데다 입출금이 비교적 자유로워 은행 예금처럼 안전한 현금성 자산으로 통한다.

FRC 예금주들은 서비스보다 돈을 택하며 은행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FRC도 예금을 붙잡기 위해 이자를 더 줘야 했다. 동시에 연준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기준금리를 0% 수준에서 약 5%p 인상했으며 그만큼 FRC의 비용 부담도 늘었다.

지난해 말 FRC의 예금은 1764억달러(약 236조원)였으며 당시 예금 규모는 전체 은행 자금의 92%를 차지할 정도였다. FRC의 예금은 지난해 13% 늘어나기는 했지만 은행은 그 대가로 지난해 4·4분기에만 4억2800만달러의 이자를 지급했다. 이는 전년 동기(2000만달러)에서 크게 늘어난 것이다.

기준금리 인상은 은행의 비용뿐만 아니라 수익에도 치명타를 날렸다. 지난해 FRC가 보유한 채권의 절반 이상이 주택담보대출이었으며 평균 대출 금리는 2.89%였다. 해당 채권들은 기준금리가 오르면서 가치가 급감했다. WSJ는 금리 인상으로 인해 해당 채권의 시장 가치가 220억달러 증발했다고 분석했다.

이미 시장에서는 FRC의 사업 모델이 금리 방향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에만 은행 주가가 40% 가까이 추락했다. FRC의 운명에 쐐기를 박은 사건은 지난 3월 발생한 실리콘밸리뱅크(SVB) 파산이었다. SVB는 금리 인상으로 헐값이 된 채권을 급하게 팔다가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비슷한 재무구조를 지닌 FRC도 SVB처럼 된다는 공포가 퍼져 뱅크런이 발생했다. 특히나 지난해 FRC 예금의 68%는 미 연금예금보험공사(FDIC)의 예금 보호 한도인 25만달러를 초과하는 예금이었다.

결국 FRC는 지난달 실적 발표에서 올해 1·4분기에 예금의 절반 이상인 약 1000억달러가 빠져나갔다고 인정했다. 같은기간 순이익은 33% 가까이 줄었다. 은행은 직원의 25%를 감원하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나서겠다고 밝혔지만 결국 이달 파산 선고를 받고 JP모건체이스에게 넘어갔다. 이번 파산은 지난 2008년 워싱턴뮤추얼은행 파산 이후 미 상업은행 역사상 2번째로 큰 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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