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점령한 경증 환자… “두드러기 환자만 하루 20명”
서울 대형 병원 응급실의 전문의 A씨는 최근 야간 근무 도중 멱살을 잡혔다. “어깨가 쑤신다. 입원시켜 달라”는 50대 남성을 진찰한 뒤 “이 정도는 내일 외래 진료를 받아도 괜찮다. 귀가해도 된다”고 했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이 남성은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진료 거부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A씨는 “이런 경증 환자들이 응급실 병상을 차지하면 진짜 급한 환자들이 피해를 본다”고 한숨 쉬었다.
얼마 전 서울성모병원 응급실의 입원 대기 시간 안내판에는 ‘21시간’이 찍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찾은 환자 16명 중 12명이 눈 충혈이나 구토 증세 등을 호소하는 경증이었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 환자 상당수도 “배가 아파서” “편도염이 심해서” 왔다고 했다.
◇경증 환자, 중증 환자의 3.8배
경증 환자들이 병원 응급실을 점령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21년 응급실 방문 환자(221만8942명) 중 40%(89만7570명)가 경증 환자였다. 중증 환자(23만6581명)의 3.8배에 달했다. 중증 환자는 심근경색처럼 10분 이내에 처치해야 구할 수 있는 환자다. 경증 환자는 요통이나 감기처럼 응급 처치가 필요 없는 환자지만, 병원 응급실은 경증 환자를 막을 수 없다. 그랬다간 의료법상 ‘진료 거부 행위’로 의사가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이형민 한림대성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응급실에서 두드러기 환자만 하루 20명 넘게 보기도 한다”며 “응급실은 의사들끼리 ‘24시간 편의점’이라 부른다”고 했다. 박정호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도 “응급의가 중증 환자에 대한 검사와 판단을 빨리 할수록 환자를 살릴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의료진이 경증 환자들에게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경증 환자가 몰리다 보니 아예 ‘경증 환자 구역’을 따로 둔 응급실도 상당수다. 서울 대형 병원 5곳 중 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서울성모병원 응급실이 경증 환자 구역을 따로 마련했다.
◇해외선 경증 환자 응급실 이용 어려워
주요 외국 중 우리나라처럼 경증 환자가 대형 병원 응급실을 아무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일본의 응급실은 1·2·3차 응급센터로 나뉘어 있다. 일명 ‘걸어 들어오는 환자’라는 경증 환자는 3차 응급센터는 이용할 수 없다. 3차 응급센터는 구급차로 이송된 중증 환자나 다른 응급 의료 기관이 의뢰한 환자만 진료한다.
프랑스도 응급실을 3단계로 운영한다. 중환자를 담당하는 대형병원 응급실(SAU), 특정 장기를 다루는 전문 병원 응급실(POSU), 경미한 환자 담당 병원 응급실(UPA)로 구분된다. 미국도 중증 환자는 해당 지역에서 규모가 큰 중증 외상센터로 이송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영국 역시 응급과 비응급 환자를 구분한다.
◇원가의 35%에 그치는 응급실 수가
응급의학과는 ‘돈 안 되는 과(科)’로 통한다. 인력과 시설을 갖추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만 수익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응급 진료 수가(의료 서비스 요금)는 응급 환자의 진료와 처치 등에 들어간 원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분석이 많다. 한국의료질향상학회 등에 따르면 응급실 수가는 규모가 큰 권역 응급 의료센터가 원가의 84%, 규모가 작은 지역 응급 의료 기관은 원가의 35%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진료할수록 손해라는 얘기다.
◇연봉 4억원 내걸어도 의사 못 구해
강원도 속초의료원은 최근 ‘연봉 4억원’을 내걸었지만 응급실 전문의를 구하지 못했다. 응급의학과 전공의 지원율은 매년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21년 100.6%에서 지난해 93.7%로 감소했다. 올해는 85.2%로 더 떨어졌다. 한 대형 병원 응급실 전문의는 “개원이 어렵고, 2~3교대 근무를 하면서 야간·휴일 당직을 자주 서는 응급의 삶은 요즘 젊은 의사들이 선호하는 생활 패턴이 아니다”라고 했다.
경증 환자의 응급실 점령과 전문의 부족에 따른 피해는 중증 환자 몫이다. 국립중앙의료원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중증 응급 환자 145만명 중 절반에 가까운 71만명이 적정 시간 안에 응급실에 도착하지 못했다. 위급한 환자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도 잇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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