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역사의 무게와 ‘무릎 꿇기’
역사에는 큰 울림을 주는 결정적 장면이 더러 있다. 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무릎 꿇기’도 그중 하나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유대인 학살을 사죄하며 비로 젖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일국의 대표가 보인 행동에서 세계는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의 모습을 목도했다. 국가 폭력과 침략의 역사 앞에서 진심 어린 사죄를 몸소 보여주는 명장면의 탄생이었다.
이 울림의 기억이 최근 다시 현실로 소환되고 있다. ‘100년이 지난 일로 일본에 무릎 꿇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주장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78년 전 일이지만, 이제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자는 뜻이다. 언뜻 괜찮은 ‘화해 이론’처럼 보인다. 맞다. 100년쯤 지났으면 용서할 건 하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지, 지난 과거를 붙들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용서와 화해란 피해자에게 무작정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역사가 과연 ‘지나간 과거’에 불과할까.
윤 대통령은 지난 24일 공개된 외신 인터뷰에서 ‘무릎 꿇기 불가론’을 주장하며 유럽의 예를 들었다.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미래를 위해 전쟁 당사국들이 협력하고 있다’고. 그런데 독일은 피해국 폴란드를 비롯한 이웃 나라에 침략과 지배를 누차 반성하고 사죄했다. 용서받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역대 독일 총리와 대통령도 나치 과거와 학살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역사를 되새김했다. 진보나 보수나 과거사 반성을 기본으로 깔고 있음이다. 과거에 책임을 져야 용서도 화해도, 밝은 미래도 온다는 사실을 잘 아는 것이다.
한편 100년 전 일로 일본에 무릎 꿇으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체가 일본 총리가 아니라 한국 대통령이라는 점에 다들 놀라워한다. 일본인조차 놀랄 일이다. 일본은 침략과 강제 동원을 비롯한 전쟁범죄와 식민 지배의 과거가 불과 10년 전일 때도, 50년 전일 때도 진정한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다. 전쟁범죄의 최고 사령관 일왕이 처벌받지 않았고 정치가들은 지금도 일급 전범의 위패를 모아둔 신사를 성지처럼 참배하고 머리를 숙인다. 제국 시대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고, 부끄러워하지 말자는 극우의 목소리는 더 머리를 든다. 또한 잊을만하면 되풀이되는 역사교과서 파동에서도 드러나듯 과거를 숨기고 부정하기 바쁘다. 과거에 대한 책임과 반성이 없으니 화해하는 현재도 협력하는 미래도 오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앞선 유럽의 사례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참혹한 전쟁 당사국들은 대체로 더 앞선 시대의 제국주의 열강이다. 2차대전 때 독일이 침략해서 정복한 프랑스도, 독일과 끝까지 맞선 영국도, 독일 편에 선 이탈리아도 그렇다. 서로 싸운 유럽 나라들은 주로 전쟁만큼 참혹한 식민 지배와 학살을 자행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그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 화해하기는, 특히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공동의 적 앞에서 또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 협력하기는 용이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유럽 열강도 2차대전보다 훨씬 앞선 ‘100년이나 지난 일’로 다시금 반성하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에서 자행한 착취와 학살이 100년이 더 지나고도 다시 살아나 비판의 도마에 오르고 사죄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독일은 100년도 지난 제국주의 시대 나미비아 지배 및 학살에 사과하고 지원책 마련에 나섰다. 벨기에에서는 100년도 지난 과거 콩고 지배와 학살의 상징 레오폴드 2세 동상이 끌어 내려졌다. 영국의 경우도 100년도 더 된 과거 일로 남아공에서 식민지 총독 세실 로즈 동상이 철거되는가 하면 옥스퍼드대학 로즈 기념물 논란으로 홍역을 치렀다. 100년은 긴 시간이지만 근본적인 자성과 진정성 있는 사죄 없이는 ‘살아 있는 시간’이자 현재진행형의 순간일 수 있다. 역사란 그렇게 무거운 것이다.
독일은 나치 전범자로 팔순, 구순 노인을 법정에 세우곤 했다. 급기야 지난해 101살의 나치 수용소 학살 관련자에 실형을 선고했다. 100년은 오랜 시간이다. 하지만 100년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잘못이 있다. 100년이 지나도 100번이나 무릎 꿇어야 할 일도 있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100년이 지나도 그렇게 무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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