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간호사’ 꼬리표 떼고… ‘예술가 노은님’을 만나다

허윤희 기자 2023. 5. 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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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한국서만 따라붙는 호칭에
“예술가는 출신 중요치 않아” 토로
프랑스 교과서에 작품 실리기도
28일까지 가나아트센터서 추모전
노은님, ‘해질 무렵의 동물’(1986).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카프카의 ‘변신’과 함께 수록된 작품이다. 198×260㎝. /가나아트센터

한국에서 건너간 간호보조원은 밤마다 그림을 그렸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낯선 땅 독일 함부르크. 외로움이 사무칠 때마다 일기 쓰듯 캔버스를 채웠다. 우연히 그림을 본 독일인 간호장의 주선으로 전시회가 열렸고, 이듬해 1973년 함부르크 국립미술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마음은 지옥이었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잠들고 일어나기를 반복해도 변한 것이 없는 날이 계속되던” 시절, 그는 “그림 그리려고 독일로 온 것도 아닌데 예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이상한 동물이 되어버렸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지난해 10월 독일에서 별세한 화가 노은님(1946~2022) 추모전 ‘내 짐은 내 날개다’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1973년 초기 드로잉부터 2021년 작품까지 화가의 반세기 예술 여정을 돌아보는 35점이 나왔다. 1층 도입부에 걸린 ‘어느 날 낙서’(1973)에는 대학 1학년 때 그림 위에 휘갈겨 쓴 ‘죽고 싶은 마음’ ‘고향을 잃어버린’ 같은 낙서 흔적이 선명하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느낀 혼돈을 검은 배경에 표현한 가로 8.5m 작품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1983) 등 대작(大作) 위주의 초기 작업을 집중 조명한다.

노은님, '하얀 눈의 황소'(1986). 뿔을 곧추 세우고 정면 대결을 펼치는 듯한 황소는 한국에서 온 여성으로 독일서 홀로 사투를 벌이던 작가 자신이다. 139x216.8cm. /가나아트센터

유럽에선 “동양의 명상과 서양의 표현주의를 잇는 다리”라고 극찬했지만, 한국에선 늘 ‘파독 간호사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생전 작가도 “예술가에게 출신은 전혀 중요치 않다”고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다. “그의 작품을 어린아이같이 순박하고 예쁜 그림으로만 주목한다면, 노은님 예술의 빛나는 보물 창고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문고리만 잡다 되돌아오는 꼴이 될 것”이라는 평(김복기 평론가)처럼, 깊은 고뇌와 명상에서 나온 폭넓은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프랑스 중학교 문학 교과서에 소개된 ‘해질 무렵의 동물’(1986) 속 검은 동물은 작가 자신이다. 노은님과 20여 년간 교류하며 보필했던 권준성(53)씨는 “1990년 이 그림을 처음 보고 매료된 프랑스 관계자들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 거장인 카프카의 소설 ‘변신’과 함께 교과서에 수록됐다”고 소개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해질 무렵의 동물'(1986)이 전시된 모습. 바닥에 전시된 작품은 검은 종이에 분필로 그린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후'(1983). 노은님은 아프리카 여러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온 후 오랫동안 방황했다. 불행한 이민자의 삶을 사는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고 원망한 세월이 사치였음을 알고, 그림도 인생도 마음먹기 따라서 얼마든지 가벼워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허윤희 기자
노은님, '무제'(2003). 262x330cm. /가나아트센터

전시 제목 ‘내 짐은 내 날개다’는 2004년 작가가 펴낸 동명 에세이 제목에서 따왔다.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앉으니 내 앞에 있던 큰 담벼락이 갑자기 내 뒤로 가 있고, 내 앞은 텅 비어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중략) 예술가로서의 자유, 그것을 얻기까지 많은 것을 지불한 셈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짐은 내 날개였던 것이다.” 전시는 2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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