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물건을 빌려달라는 친구[오은영의 부모마음 아이마음]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2023. 5. 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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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잘 빌려주고 잘 돌려받기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학교에 다녀온 아이가 같은 반 친구가 자꾸 연필을 빌려달라고 해서 짜증이 난다고 한다. 어제도 빌려줬고 그제도 빌려줬는데, 오늘도 또 빌려달라고 했단다. 아이는 어제 그제 연필을 빌려 썼으면 오늘은 좀 챙겨 왔어야지 왜 계속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남의 물건을 빌렸으면 조심히 써야 하는데, 오늘 빌려준 지우개 달린 연필은 돌려줄 때 보니 지우개가 빠져 있었다. 엄마는 “그럼, 내일부터는 빌려주지 마”라고 했더니, 아이는 더 짜증을 내면서 “걔도 그렇고 다른 애들이 치사하다고 한단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이럴 때 도대체 뭐라고 조언해야 하는지 물었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사실 연필을 안 챙겨 와서 매번 남한테 빌리는 것은 그 친구의 문제이다. 그 친구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 내가 연필이 여러 자루라 빌려줄 수 있는 상황이면 그냥 빌려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친구가 여러 번 빌려달라고 했다고 해도, 내가 언제나 연필이 여러 자루라 빌려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빌려줘도 상관없다. 한 번이든 열 번이든 내가 오늘 빌려줄 수 있으면 빌려주면 되고,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빌려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못 빌려주는 것이다. 아이가 ‘쟤는 왜 자기 것을 못 챙겨 가지고 와서 맨날 나한테 빌려 달래?’라는 생각에 짜증이 나는 것은, 그 친구의 문제를 자신이 떠안아 고민하는 꼴이다.

친구들의 이런 행동에 짜증을 많이 내는 아이들을 보면, 대개 본인은 규칙을 잘 지키고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약간은 통제적인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다. 어른들 중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틀에서 많이 벗어난 사람을 지나치게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그 사람의 어떤 것이 내 마음에 들 필요는 없다. 아무리 내 마음에 안 들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문제이다. 이런 아이들은 형제자매가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 것에도 지나치게 신경질을 내기도 한다. 동생이 옷을 잘 걸지 않거나 자기 물건을 잘 잃어버리고 오는 것에도 짜증을 낸다. 그럴 때 부모는 “네가 잘하는 것은 맞아. 그런데 이건 동생의 문제야. 우리가 잘 가르칠게. 우리가 부모이니까. 그런데 동생이 한 번에는 잘 못 배우는 것 같아. 여러 번 잘 가르칠게. 네 말이 맞긴 맞는데 그걸로 그렇게까지 네가 너무 괴로울 것까지는 없어”라고 내 문제와 네 문제, 내 것과 네 것을 분명하게 구별하며 말해줘야 한다.

친구가 내 물건을 빌려 가서 잘 쓰고 돌려준다면 그 횟수가 몇 번이라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단, 내 물건을 함부로 사용해 망가뜨려서 돌려주거나 잃어버리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한마디 해줘야 한다. “아까운 것은 아니지만 빌려줬으면 잘 돌려줘야지. 야, 이거는 좀 그렇다.” 친구가 이 말을 듣고 미안해한다면 또 빌려줘도 된다. 또 빌려줄 때는 “이번에는 잘 쓰고 잘 돌려줘”라고 좋게 말해 준다.

하지만 친구에게 빌려줄 때마다 마음이 좀 많이 불편해진다면 “여러 자루는 있는데, 오늘은 좀 안 내키네”라고 말하고 굳이 빌려주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연필은 나의 소유이고, 내 물건이다. 매번 빌려가던 친구가 “왜? 너 연필 많잖아?”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네가 언제나 잘 안 돌려주잖아. 함부로 하잖아”라고 말하도록 한다. 그 친구가 “오늘은 잘 쓰고 돌려줄게” 그러면 “그래” 하고 빌려주면서 문제를 조율해 나가도록 한다. 인간관계에서의 이런 사소한 갈등은 언제나 내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면서 조율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친구와 심각하게 싸울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그 친구의 행동이 너무 짜증이 난다면 하면, 이렇게 조언해 주자. “학교에 올 때 연필을 잘 챙겨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네 생각은 옳아. 네가 잘 지내는 것은 맞는데, 그러나 연필을 잘 안 챙겨오는 것은 그 친구의 문제야. 빌려달라는 상황에서는 그냥 네가 빌려줄 수 있으면 빌려주는 것이고 빌려줄 수 없으면 못 빌려주는 거야. 그 친구가 빌려달라고 하게 되는 그 근원적인 이유를 네가 해결해줄 수는 없어. 그 문제를 가지고 네가 괴로워할 필요도 없어. 너는 그냥 네 상황에서 연필을 빌려줄 수 있을까 없을까만 고민하면 되는 거야.”

아이가 “난 연필이 많아도 이제는 걔 빌려주기 싫어요” 하면 “너무 마음이 힘들면 못 빌려주는 거지 뭐. 못 빌려주는 이유를 그 친구에게 얘기는 해. ‘야 치사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다 망가뜨리는데 나도 이제는 빌려주기 좀 싫다’라고 얘기하면 돼”라고 가르쳐준다. 아이가 “걔가 나보고 나쁘대요. ‘넌 욕심꾸러기야’ 그러면요?”라고 물으면 “그럴 때는 ‘그건 네 생각이고 다음부터는 잘 챙겨 와라’라고 그냥 네 생각을 말하면 돼”라고 상대의 반응에 관계없이 그냥 편하게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도록 많이 가르친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오은영 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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