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알약 한 알을 먹는다는 아주 쉬운 일
내 친구는 서른다섯 살이 넘도록 알약을 못 삼켰다. 어렸을 때 알약을 먹다가 심하게 사레가 걸린 이후 알약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올라와 알약을 다시는 복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감기나 소화불량으로 간간이 약을 처방받으러 올 때까지는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다. 먹는 약을 처방하지 않기도 했고, 쪼개서 복용해도 되는 알약이나 캡슐약을 처방하면 됐다. 그도 싫다면 약국에서 파는 아이들용 해열제 시럽을 사서 먹도록 용량을 써 주면 되었다.
문제는 이 친구가 피부에 곰팡이가 생겨 매일 항진균제를 복용해야 하면서부터 생겼다. 몇주 동안 쓴 가루약을 먹느라 친구가 너무 고생한 끝에 아예 약 먹는 것을 거부하게 됐기 때문이다. 평생 약 먹을 일이 없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런가.
나는 친구에게 알약 먹는 훈련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약을 복용할 일이 있을 때마다 아주 작은 약부터 시작해서 점차 크기를 조금씩 키워갔다. 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는 그 친구에게 문병을 갔을 때, 이제는 병원에서 주는 약들을 다 삼킬 수 있게 되었다고 환하게 웃으며 얘기해 드디어 우리의 훈련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구약을 못 먹으니 차라리 주사로 약을 맞겠다거나, 시럽으로 처방해달라는 성인들이 종종 있는 것을 보면 알약을 먹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겠다 싶다.
한국의 건강보험은 만 12세를 기준으로 시럽약 처방이 불가능하도록 돼 있다. 동일한 성분이 알약과 시럽약으로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에는 12세 미만의 유·소아들에게만 시럽약 처방이 가능하다. 12세 이상이 되었는데도 시럽약을 처방하려면 알약을 먹을 수 없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만 한다.
12세 이상이 되었는데도 시럽으로 약을 처방하려면 양이 너무 많아져 버리게 된다. 체중을 기준으로 시럽의 양을 따지다 보면 자칫 성인 용량을 넘어가 버리기도 한다. 시럽은 대개 유·소아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달달한 맛과 향이 나도록 백당, 수크랄로스, 인공 색소와 향료가 들어 있는데, 이걸 많이 먹는 게 뭐가 그리 좋겠는가. 게다가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만성질환에 꾸준히 복용해야 하는 약들은 아예 시럽제로 생산되지 않는다.
나는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에게는 알약을 먹을 수 있는지 아닌지 물어보고 약을 처방하는데, 9~10세가 넘었는데도 아직 시럽약을 고집하면 알약을 시도해 볼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어차피 열두 살이 되면 시럽약을 먹을 수 없거든. 이제 2년만 있으면 열두 살이잖아. 그러니까 미리 작은 알약으로 한번 연습해볼까? 선생님이 오늘 처방해 줄 약은 쌀알만 한 크기니까, 아마 삼키는 게 어렵지 않을 거야.”
생전 처음 알약을 시도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처방하는 약은 클로르페니라민 2㎎이나 레보세티리진 5㎎과 같이 작은 알약들이다. 그리고 다음에 오면 알약을 잘 먹었는지, 삼키기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격려해준다. 이제 어른이 다 되었는데! 다음부터는 좀 더 큰 약을 먹어도 되겠는데!
하지만 알약을 삼키는 기능은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레에 잘 걸리게 되거나 뇌졸중으로 연하곤란이라도 생기면 알약을 삼키기 힘들어진다. 특히 어르신들은 500㎎, 1000㎎의 커다란 당뇨약을 삼키기 어려워한다. 이런 약은 서방정(서서히 방출되도록 디자인된 약)이라 잘게 쪼개서 먹으면 큰일 난다.
나는 재활치료사를 통해 배운 방법을 알려드린다. 혀가 입 밖으로 나오도록 앞니 사이에 빼 물고 입술을 꽉 닫은 다음 턱을 당기고 침을 꿀꺽 삼키도록 일러준다. 사레에 잘 걸리는 나도 매일 훈련 중이다. 알약 한 알 먹는다는 게 참 쉬운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살림의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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