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간 매년 1권… 다섯번 암 재발에도 펜 안 놨다
12년간 회사원 생활을 하던 이 여성은, 2005년 갑상선암이 재발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직장을 그만뒀다. 투병 중에도 펜을 놓지 않았다. 올해로 전업작가 19년 차. 그간 20권의 책을 냈다.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2015), ‘자유로울 것’(2017), ‘어디까지나 개인적인’(2015), 소설집 ‘호텔 이야기’(2022) 등으로 20~40대 여성 독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임경선(51) 이야기다.
1년에 1권 이상 성실하게 써내려간 책들은 소위 ‘망한 작품’ 하나 없이 수만 부씩 팔렸다. 7년 전부터 연 1억~2억원대 수익이 통장에 찍히는데 대부분 인세다. “글만 썼어요. 앞만 보고 달렸죠. 다행스럽게도 대기업에 계속 다녔다면 받았을 정도의 돈도 벌고 있어요. 작가로서의 충족과 기쁨은 별개이고요.” 지난달 서울 광화문에서 기자와 만난 그의 말이다.
정치학을 전공한 임경선은 대학 졸업 후 광고 대행사와 음반 회사 등에서 일했다.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과 소피 마르소가 나오는 액션 영화 ‘007 언리미티드’(1999·원제는 ‘The World Is Not Enough’)의 한국 제목이 광고 대행사 직원 시절 그에게서 나왔다. 처음 이름을 알린 건 작가로서가 아니라 칼럼니스트로서다. 일간지에 독자들의 사연을 받아 상담하는 고정 칼럼을 연재해 인기를 얻었고, 라디오 방송 게스트로도 6년간 활동했다. 그 콘텐츠를 책으로 가져갔다. 그의 책 중 상당수가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건 그 때문이다.
지금은 ‘롱런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 그에게도, 생계를 위해 잡지 칼럼 연재 등 ‘부업’을 닥치는 대로 했던 때가 있었다. “작가로서 ‘아웃사이더’ 설움을 오래 겪었다”고 그는 말했다. “‘정통’ 작가가 아니라는 편견 때문에요. 연애 칼럼니스트나 라디오 출연자 이미지를 벗으려 부단히 애썼죠.”
책이 잘 팔리는 것과는 별개로 업계에서 ‘작가’로 불리기 시작한 건 책을 열 권쯤 내고 나서부터였다고 한다. 에세이로 성공을 거둔 이후 처음 시도했던 소설 ‘어떤 날 그녀들이’(2011)가 베스트셀러가 됐을 땐 ‘대필 소문’도 돌아 속앓이를 했다. “요즘은 이런 모든 과거의 경험들이 제게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그래도 독자만큼은 편견 없이 글로만 평가하더라”며 “그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작가 임경선’의 이름을 알린 분기점이 된 건 2015년 나와 18만 부 가까이 팔린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 출간 이래 거의 매달 증쇄를 거듭했다. “노력이라는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따르지만 그 고통을 통해 배우라”는 엄격하면서도 단정한 ‘태도’에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젊은 독자들이 열광했다. 그는 “쓰고 싶은 글만으로 밥 먹고 살게 해준 ‘고마운 작품’”이라고 했다. “코로나 터지기 직전 딸과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대각선 앞자리 승객이 그 책을 꺼내들더라고요. 그때서야 제 책을 많은 분들이 보는구나 실감했죠. 감사 인사하고 싶었는데 결국 못 했어요. 뒤에서 제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그 분이 책을 덮지 못할까봐요(웃음).”
시원시원한 문체와 한국 여성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이 인기를 끄는 요인이다. 임경선은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일본·미국·포르투갈·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이 글 쓰는 직업으로 자신을 연결해 준 것 같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학을 자주 다녀 친구가 없었던 제가 편히 갈 수 있는 곳은 도서관뿐이었어요. 책을 빌려 매일 밤 읽었어요. 눈은 나빠졌지만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지금도 도서관에 ‘마음의 빚’ 같은 게 있어 도서관 강연 섭외가 오면 꼭 가요.”
그의 작가 생활은 늘 몸의 고통과 함께였다. 스무 살 때 처음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뒤 다섯 차례 재발해 최근까지 암 수술을 받았다. 그는 “좌절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담담해지더라”며 “이제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잘 놀라지 않게 됐다”고 했다.
암과 싸우는 중에도 매년 한 권씩 썼다. 고등학생 딸을 둔 23년 차 주부이기도 한 그는 “작가로서 ‘슬럼프’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비결은 자기 규율이다. “딸 등교 후부터 시작해 하교 즈음인 4시까지 ‘직장 생활’ 하듯 매일 글을 써요. 시간이 귀하다 보니 책상 앞에서 ‘예열’을 할 시간도 없이 그냥 씁니다.” 다양한 사회생활을 했던 것, 좋은 작품을 반복해 읽는 것, 그리고 초심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냉수 마찰’도 오래 달리는 힘이 됐다고 했다.
그는 “팬들이 찾아오는 북토크나 강연 말고도 기업체나 군부대 강연처럼 나를 그다지 환영하지 않을 것 같은 곳에도 일부러 다닌다”며 “나도 모르게 어깨에 들어갔던 힘도 빼고 ‘내가 별것 아니다’라는 것을 느끼는 ‘냉수 마찰’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건 ‘계속 쓰는 것’이죠. 감정의 소용돌이 속 흔들리는 인간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밀도 있게 써나가고 싶습니다.”
[임경선의 ‘나의 원동력’]
나는 성공한 하루키 덕후
”무라카미 하루키가 꾸준히 글을 쓰고 있어 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쓰고 싶다. 그의 작품 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가장 좋아한다. 이달 와세다대에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에서 ‘한국에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주제로 초청 강연을 한다. 나는 ‘성덕’(성공한 덕후)이다.”
내 글쓰기의 ‘영양제’는 좋은 책 읽기
”좋은 책을 잘 골라 ‘영양제’ 먹듯이 읽어줘야 한다. ‘아, 그래 나 이런 글 쓰고 싶었어’라는 생각이 나를 계속해서 작가로 살게 해준다. 인상적인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 편. 매일 밤 음악을 들으며 경복궁, 덕수궁, 청계천 등을 달리는 일도 내 안의 영감을 깨워준다.”
내 인생의 멘토, 박용만 회장
”마지막 직장이었던 두산에서 상사로 만난 박용만 전 회장님. 암이 재발했을 때 ‘무조건 회사를 그만두고 몸부터 챙기라’고 조언해주신 분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작가가 됐다. 요즘도 연락하며 지혜를 나눠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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