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홍의 컬처 엔지니어링] 영자팔법(永字八法)과 대한민국 재창조
성심껏 조심스레
한 획 두 획 그으며
미래로 갑시다!
# 42년 전인 1981년 송천(松泉) 정하건(鄭夏建) 선생의 인사동 서실로 붓글씨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송천 선생은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의 서예 선생으로도 이름이 높았다는데 당시 대학 초년생이었던 나는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다만 당시 서실에는 젊은이가 드물었고 게다가 남학생은 나뿐이어서인지 송천 선생은 나를 각별하게 대해주시고 당신이 직접 쓰신 체본을 남보다 자주 내려주셔 그걸 보고 반복해서 연습하며 쓰도록 하셨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체본의 첫 단계는 길 ‘영(永)’ 자 한 글자였다. 그 한 글자 안에 서예와 서도의 기본이 되는 여덟 획이 모두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른바 영자팔법(永字八法)이 그것이다.
# 옛사람들은 영자팔법과 관련해 적잖게 글들을 남겼는데 그중 당나라 시대의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영자팔법송이 특히 흥미롭다. “점은 측(側)이라 하는데 마치 웅크린 매가 떨어뜨리는 돌처럼 해야 하고, 가로 획인 늑(勒)은 천천히 기민함을 감추어야 하며, 세로 획인 노(努)는 이슬이 내리는 듯 기세를 완곡하게 하며, 갈고리처럼 생긴 적(趯)은 빠르게 송곳처럼 하며....” 한마디로 ‘길고 오래 영원히 언제까지나’의 의미가 담긴 ‘영(永)’ 자 한 글자를 쓰는 과정과 방법에 삼라만상의 움직임과 기운을 고스란히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하니 예부터 인물을 선택하는 데 기준으로 삼던 조건인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 중에 ‘서(書)’가 든 까닭이 짐작이 간다.
# 그러나 요즘에야 어디 여간해선 ‘서(書)’를 쓸 일도 볼 일도 드물다. 기껏해야 방명록에 글을 쓸 때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미국을 국빈 방문했던 윤석열 대통령이 백악관 방명록에 남긴 서(書)를 보면 역대 어느 대통령의 것보다 단정하고 반듯하다. 그런데 이것을 놓고도 말들이 적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서명 아래 ‘대한민국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라고 썼다는 이유만으로 그랬다. 그래서 찾아보니 이전의 다른 대통령 부인도 대통령 이름 아래 함께 이름을 올린 적이 없지 않았다. 물론 대통령만의 단정하고 반듯한 서(書)가 돋보이도록 대통령 배우자의 서명은 생략했더라도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은 들었다.
# 그제 어느 모임에서 내 옆에 앉은 이름 대면 알 만한 보수 유튜버와 이런 얘기가 오갔다. “이번에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을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저렇게 유창하고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영어 연설을 하다니...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토록 훌륭하게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데 왜 이전의 나토나 G20 같은 다자 간 모임에서 다른 나라 정상들과 만났을 때는 그저 웃고만 있었는지 그게 너무 궁금합니다.” 그러자 함께 자리했던, 역시 보수적인 성향의 모 교수는 자신이 영국에서 유학한 사실을 밝히면서 ‘그건 듣기가 안 되기 때문’이라고 단정 짓듯 말했다. 네이티브 스피커 뺨칠 정도로 유창한 영어 연설이 가능해도 상대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면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 초래된다는 것이었다. 듣기가 안 돼 일대일 소통은 어렵지만 다중을 앞에 놓고 농담까지 섞어가며 연설하는 것은 연습하기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 의회 연설에서 대통령이 구사한 발음과 억양 그리고 제스처는 며칠 연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 다져온 것이란 생각은 양보할 수 없었다.
# 물론 그 교수의 주장처럼 대통령의 영어 듣기가 가능한지 아닌지는 여기서 갑론을박 따지며 거론할 문제가 못 된다. 오히려 진짜 짚어야 할 것은 대통령의 ‘영어 듣기’가 아니라 대통령의 ‘민심 듣기’ 능력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 언어적인 차원이 아니라 심정적으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제대로 듣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이 자신과 다른 의견을 잘 듣지 않는다는 소문은 사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지난 대선 때부터 있었던 말들이다. 물론 대통령의 귀가 열려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만약 대통령의 귀가 닫혀 있다면 왜 그런지 파악해서 개선해야 할 일이지 듣지 않는다고 힐난만 할 일은 결코 아니다.
# 꼭 30년 전 청와대 시절 2년 정도 수석회의에 참석해 본 필자의 경험에서 유추해볼 때, 대통령이란 자리는 일년만 앉아 있으면 세상만사를 모두 꿰뚫을 만큼 엄청난 정보를 습득하기 마련이다. 장관이나 수석은 자기 분야에 국한되고 심지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조차도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의 정보마저 대통령은 모두 보고받고 접할 수 있기에 정보의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대통령을 넘어설 이는 주변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윤 대통령처럼 정보소화력이 대단한 사람인 경우에는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다 아는 얘기일 수밖에 없고 심지어 그것에 대해 대통령 나름의 판단이 서버린 경우 또한 허다할 것이다. 그래서 회의를 해도 대통령이 거의 말하고 지시를 하며 대통령이 하나하나 구체적인 사안의 해결책까지 내놓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집권 1년 차의 ‘전지전능의 함정(올마이티 트랩)’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지금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에 차 있다. 그래서 더더욱 그 누구도 대통령에게 직언하기 힘들다. 대통령이 귀 기울이는 사람은 영부인 김건희 여사라고들 한다. 여염집에서는 남편이 부인 말을 잘 들어야 집안이 안정되고 일이 잘 풀린다. 하지만, 국가는 대통령이 국민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잘되고 잘 풀릴 수 있다. 국민이 하늘이고, 길잡이며, 곧 부인이기 때문이다. 이제 윤 대통령이 취임한 지도 어언 1년이 다 되어 간다. 정확하게 일주일 후면 취임 1주년이다. 대통령이 국민 저변의 목소리에 더 귀를 열기 바란다. 아울러 앞서 언급했던 영자팔법의 획 긋는 방법을 다시 세밀하게 살펴 대한민국 재창조의 한 획, 한 획을 조심하고 성찰하며 정성을 다해 그어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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