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의 거리두기] 누가 충성을 강요하는가
“조직을 사랑한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이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국가정보원 댓글사건 특별수사팀장에서 배제된 여주지청장 윤석열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서울고검 국정감사에서 한 이 유명한 말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위법한 지휘와 감독은 따를 필요가 없다는 소신을 당당하게 펼치는 모습에서 공정과 법치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속 시원하게 들리는 이 말의 속뜻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문제는 공정과 법치를 실천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말이 항명과 하극상이라며 반발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으면 조직이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니 조직을 사랑하느냐고 따져 묻는 말에 그는 대단히 사랑한다고 답한 것이다. 한때 윤석열 대통령에게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되었던 이 말이 이제는 그를 공격하는 수단이 된 것을 보면, 이 말의 뜻이 처음부터 애매했거나 아니면 맥락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지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였는지도 모른다. 조직과 사람은 정말 대립하는가? 조직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에게 충성할 수 있는가? 사람에게 충성할 수 있도록 만드는 조직은 어떤 것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말을 떠올린 것은 드라마보다 천박하게 더 드라마틱한 현실 정치 때문이 아니다. 벚꽃이 한창이던 어느 날 진해군항제에 동원된 어느 공무원이 터뜨린 불만 섞인 목소리가 이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 계기였다. 축제 기간 2000명 넘게 차출된 공무원은 대부분 6급 이하로 차량 통제, 주차 관리, 관광 안내뿐만 아니라 불법 주정차나 노점상 단속 업무도 했다. 정식 업무 이외에 자신의 직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짜증나는데 단순 복무 점검이라는 이유로 감시까지 당한다고 느끼니 공무원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된다.
이들의 불만은 지극히 간단하다. 일상 업무도 과다한데 축제 업무까지 도맡느라 본래 해야 할 일을 제때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 차출된 공무원은 대체로 하루 8시간 일하는데 정상 초과 근무는 하루 최대 4시간까지만 인정되기 때문에 근무시간 대비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공짜 노동을 즐겁게 하겠는가? 무임금 차출이 단지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MZ세대 공무원의 불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극명하게 표출된다. “이 조직에 들어오겠다고 발버둥친 내가 바보다.”
변한 것은 세대가 아니라 시대
그렇다면 MZ세대 공무원은 사람뿐만 아니라 조직에도 충성하지 않는 것인가? MZ세대는 일한 만큼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직장인이든 공무원이든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물론 기성세대는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수당이나 특별수당을 바라기는커녕 ‘까라면 까’ 식의 조직문화에 익숙한 기성세대에게 MZ세대 공무원의 주장은 낯설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기성세대가 공무원에게는 ‘국민에게 봉사한다’는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MZ세대는 헌신하는 만큼 공정하게 대우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조직에 무조건 충성하는 것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게 아니라는 의심이 묻어 나온다.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사명감이나 관료제적 위계질서만으로 공무원 조직을 운영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공무원에게 요구하는 ‘봉사(奉仕)’는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봉사는 글자 그대로 ‘받들고 섬기는 것’이다. 회사는 구성원들이 기업이라는 조직을 받들고 섬기기를 바랐다. 국가도 마찬가지로 공무원들이 국가라는 관료제 조직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기를 바란다. 국가든 기업이든 모두 조직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의 궁극적 목표는 구성원들 개개인의 융성이 아닌가? 공무원들의 봉사 대상인 국민의 행복이 국가의 과제라고 한다면, 공무원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현대인들은 회사를 더 이상 평생직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MZ세대는 아무리 연봉이 높은 좋은 직장이라고 해도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옮긴다. 한때 우리는 자신을 직장과 동일시한 적이 있었다. 삼성에 다니면 자연스럽게 ‘삼성인’으로, 현대에 다니면 ‘현대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이런 문화가 붕괴한 것이다. 지금은 ‘워라밸’이라는 용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자신의 삶을 중심에 놓는다. 21세기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주의’가 드디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변한 것은 사실 세대가 아니라 시대다. 시대가 근본적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가치와 MZ세대의 가치가 충돌하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소속감과 성취감을 중시하는 집단주의에 젖어 있다면, MZ세대는 자율성과 의미에 기반한 개인주의를 선호한다. 기성세대는 MZ세대가 일은 하지 않고 보상만 바란다고 불만이지만, MZ세대는 자신의 삶에 ‘의미 있는’ 일을 원할 뿐이다. 일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을 싫어하는 것이다. MZ세대 공무원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도 간단히 말하면 ‘의미 없는 일’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MZ세대, 정치에도 등 돌릴까 걱정
많은 MZ세대 공무원들이 그동안 신의 직장이라 불렸던 공직사회를 떠나는 현상은 시대와 사회가 변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개인주의로 무장한 새로운 세대가 조직에 충성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은 언제 조직에 충성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21세기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충성은 강요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충성은 본래 임금이나 국가에 대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을 의미한다. 충성은 어떤 개인이나 조직에 대한 강력한 지지의 감정이다. 우리는 감정을 강요할 수 없다.
어떤 조직에 대한 감정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애국심이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 가지는 소속감과 유대감이 바로 애국심이다. 애국심은 여전히 국가의 조직과 통일성을 유지하는 강력한 정치적 자원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살아갈 곳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애국심을 강요할 수 없다. 국민에게 애국심을 요구하려면, 국가는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가치를 대변하고 사회의 기본 구조가 정의로워야 한다. 우리가 대한민국에 애국심을 갖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헌법정신 때문이지 단순히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고 헌법정신에 충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국민에게 충성을 요구하려면, 조직을 구성하는 원칙이 투명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정의론>의 저자 존 롤스가 정의의 일차적 주제는 권리와 의무를 배분하고 사회 협동체로부터 생긴 이익의 분배를 정하는 “사회의 기본 구조”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무원들이 정상 업무 이외의 일을 위해 차출되는 이유가 분명하고 그러한 일에 대한 보상이 공정하게 주어진다면, 공무원들이 불만을 터뜨리거나 공직사회를 떠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조직을 더 이상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혈연, 지연, 학연이 유대감을 강요하는 사회는 자유롭지 못한 사회이다.
우리가 충성할 수 있는 조직은 오직 ‘정의로운 조직’이다.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조직이 헌법정신에 따라 정의로워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조직이 정의롭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역사적 경험에서 “정의롭지 못한 조직은 언제나 충성을 강요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우리는 충성의 역설을 간파할 수 있다. “충성을 강요하는 조직은 정의롭지 못하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많은 MZ세대 공무원이 공직사회를 떠나는 현상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자유로운 토론은커녕 다른 의견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우리의 정치문화로 인해 MZ세대가 정치에도 등을 돌릴까 두렵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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