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저 아픈 거 부모님껜 비밀입니다”...성직자와 어버이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 5. 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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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부모-자식처럼 가까이하지 못하는 애틋한 사연 다룬 책-영화
어버이날 카네이션.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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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픈 거 부모님껜 비밀입니다. 그래서 인터뷰, 특히 사진은 못 찍습니다.”

종교인들을 취재할 때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주로 천주교 사제나 불교 스님처럼 독신 성직자들에게 듣습니다. 기브스를 하거나 투병 과정에서 체중이 너무 줄었거나 해서 눈에 확 띄는 경우들입니다. 가족을 떠나 독신 성직 생활을 하는 아들이 혼자 아프다면 부모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플까요. 그래서 독신 성직자가 아플 때 그 부모님이 제일 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걱정하고, 자식은 어버이가 자신을 걱정할까봐 걱정하는 것이지요. ‘남(南)수단의 성자’로 불리는 고 이태석 신부도 그랬습니다. 2009년 12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깜짝 놀라는 기자에게 그는 “이제는 기사 써도 되고, 사진 찍어도 된다. 그동안 주변 사람 다 알아도 어머니께는 감춰왔는데, 얼마 전 어머니도 아시게 됐다”며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다음주 어버이날을 앞두고 성직자와 어버이의 애틋한 이야기 몇 가지를 정리해봅니다.

#주교 아들과 찍은 사진 평생 머리맡에

정진석 추기경(왼쪽)과 어머니 이복순 여사. 어머니는 외아들이 주교가 되고 촬영한 이 사진을 평생 머리맡에 두고 지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고(故) 정진석 추기경은 어머니가 당시 노기남 대주교와 담판을 벌인 덕분에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 추기경은 사회주의운동을 하다 월북한 부친의 존재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외아들이었지요.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던 정 추기경은 6·25전쟁을 겪으며 ‘사제’로 인생방향을 전환합니다. 문제는 당시만 해도 외아들은 ‘대(代)가 끊긴다’는 이유로 신학생으로 받아주지를 않았던 것이죠. 그러나 독실한 신자였던 정 추기경의 어머니 이복순 여사는 노기남 대주교와 담판을 벌여 신학교 입학 허가를 받아냈지요. 그렇게 외아들을 사제로 바친 후에도 ‘보고 싶다’는 말 한 마디 없던 어머니는 아들이 39살의 나이로 주교가 된 후 “사진 한 장만 찍자”고 해서 촬영한 사진을 평생 머리맡에 두고 지냈다고 합니다. 2018년 출간된 정 추기경의 회고록 ‘추기경 정진석’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어려울 때 풀어보라” 보따리 속엔…

아들 넷을 신부로 바친 이춘선 할머니(왼쪽)와 그의 편지와 구술 등을 모아 아들 신부가 펴낸 책 '네 신부님의 어머니' 표지./바오로딸 출판사

2017년 출간된 ‘네 신부님의 어머니’라는 책은 아들 딸을 성직자·수도자로 출가시킨 어머니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 많습니다. 주인공 이춘선(1921~2015) 할머니는 슬하 11남매 중 신부 네 명, 수녀 한 명, 손자 한 명까지 신부로 키웠습니다. 이 할머니는 성당 주일학교에서 한글을 배워 수시로 편지를 썼고 그 편지들과 구술 내용 등을 모아 아들 신부가 책으로 펴냈지요. 40대 후반에 얻은 막내가 사제가 돼 임지로 떠나게 되자 어머니는 보따리 하나를 건네며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풀어보라”고 하지요. 전래 동화의 비단주머니처럼요.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들은 바로 보따리를 풀었지요. 보따리 안엔 무엇이 있었을까요? 자신이 애기 때 입은 배넷저고리와 편지 한 장이었답니다. 아들 신부는 보따를 풀곤 한참을 울었답니다. 편지엔 “사랑하는 막내 신부님, 신부님은 원래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지요. 난관을 헤쳐가는 열쇠는 역설적으로 ‘겸손’임을 알려주신 것이지요. 이춘선 할머니의 유언은 “내 장례미사 때 강론 시간에 신자들을 한바탕 웃겨달라”는 것이었답니다. 막내 신부는 어머니 장례미사 날 선글라스를 쓰고 강론해 어머니의 유언을 지켰다지요.

#”생일엔 애비, 애미랑 식사해요”

얼마 전 이 란에서 소개한 강석진 신부의 책 ‘인생수업’ 중에도 부모님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강 신부의 부친은 아들이 사제품을 받게 되자 “앞으로 생일날엔 밥 같이 먹자”고 하셨다지요. 천주교 신자나 사제는 세례 때 세례명을 받지요. 세례명은 성인이나 성녀의 이름을 따는데 각각의 축일(祝日)이 있습니다. 강 신부의 아버님이 말씀하신 ‘생일’은 생물학적인 생일입니다. “이제 축일이 되면 본당(성당)에서 신자들과 지낼 테니 앞으로 아들 생일이 되면 집에 와서 이 애비, 애미랑 함께 식사하는 겁니다. 알겠죠?”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생일엔 밥 한 끼라도 따로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지요.

이 책엔 동료 신부와 어머니 에피소드도 등장합니다. 동료 신부가 요양원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랜만에 남대문시장 나들이를 했답니다. 그날 오후 요양원에 모셔드리니 어머니의 말씀. “아들 신부님, 오늘은 너무너무 행복했어요. 오랜만에 우리 아들 신부 손잡고 걷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돌아다니고,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아들 신부님, 정말 고마워요.”

#성철 스님과 금강산 유람한 모친

성철 스님의 부친 회갑연 때 촬영한 부모님 사진(왼쪽)과 해인사 백련암에서 촬영한 성철 스님.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 스님과 어머니의 금강산 유람 에피소드도 유명합니다.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 원택 스님의 ‘성철 스님 시봉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철 스님이 출가 후 금강산 마하연 선방(禪房)에서 참선수행할 때였습니다. 하루는 성철 스님 어머니가 거기까지 찾아왔습니다. 성철 스님은 소식을 듣고도 내다보지도 않았다지요. 그러자 함께 수행하던 다른 스님들이 술렁였답니다. “아무리 그래도 진주에서 금강산까지 찾아오셨는데 외면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어머니를 맞든지, 아니면 선방을 떠나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와 만난 성철 스님은 “뭐하러 여기까지 찾아오셨냐”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지요. 어머니 답은 더 걸작입니다. “나는 너 보러 온 거 아니다. 금강산 구경 왔지.” 결국 성철 스님 모자는 덕분에 금강산 유람에 나섰습니다.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보고싶던 아들 손 잡고 금강산 구경 잘 했제. 어째 험한 길에 가면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 그래 금강산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에 분간이 안 되는 기라. 금강산 구경 잘 하고 헤어졌제.”

#어머니와 여행 영화로 만든 마가 스님

마가 스님과 어머니의 마지막 여행을 다룬 영화 '불(佛)효자'의 지난해 시사회 포스터. 작년 제작된 이 영화는 올해 서울국제노인영화제에 초청된 것으로 계기로 전국 순회 상영도 계획 중이다.

‘자비명상’으로 유명한 마가(63) 스님은 지난해 어머니와 공동주연(?)한 영화 ‘불(佛)효자’(감독 최진규)를 만들었습니다. 마가 스님이 구순(九旬)의 어머니를 모시고 전국의 사찰 50여곳을 함께 여행하는 영화였습니다. 어머니와 여행이라면 두 분이 평소에도 친밀했던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님이 스무살에 출가하던 당시만 해도 속가(俗家)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터부시하던 때입니다. 속가 가족, 어머니와 다시 소식을 주고 받게 된 것은 수십년이 지나서였답니다. 그리고 어머니 구순을 맞아 나들이 선물, ‘지구별 마지막 여행’을 계획한 것이 영화로까지 발전됐답니다. 영화에서 스님은 때론 휠체어를 밀고, 때론 등에 업고 계단을 오르며 어머니와 사찰 순례를 다닙니다. 거의 3년 가까이 틈틈이 촬영했고 지난해 5월 공개됐는데요, 어머니는 개봉을 한 달 앞둔 작년 4월 3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영화에서 스님은 어머니에게 “왜 어릴 때 ‘사랑한다’고 말로 안 해줬느냐”고 묻습니다. 어머니의 답은 이렇습니다. “너 잘 때 뽀뽀하고 ‘사랑한다’고 했지.” 아들 스님과 생애 마지막 여행을 한 어머니는 행복하셨던 듯합니다. “더 이상 바랄 것 더 뭐있어? 스님 덕에 이렇게 나와서 구경도 하고. 그렁께 좋지.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영화는 작년 코로나 와중에 지역별 시사회를 마친 후 정식 개봉되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는데 올해 서울국제노인영화제에 초대됐다고 하네요. 또 이를 계기로 전국 순회 상영도 예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가 스님은 “코로나 시국에 결국 가족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며 만든 영화”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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