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짬뽕을 만드는 시인

2023. 5. 2.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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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사진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러니까 그는 환갑을 훨씬 넘긴 늦은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내처 고등학교까지 진학한 것이다.

그는 해마다 자신이 가꾸고 수확한 옥수수를 보내왔다.

그래서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따듯한 한 끼 밥을 내주고, 밭을 갈고, 삶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우리 곁에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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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사진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 사진을 본 내 입에서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온 소리가 이거였다. “그랬구나!” 수긍과 긍정과 감탄이 뒤섞인 이 말은 그 사람에 대한 이해이자 경의였을 것이다. 늦은 나이에도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는 자세라니. 그 의식과 태도가 멋져 보였고, 또 얼마간 부러웠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늘 주저했고, 늘 안 될 거라 예단했고,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런 까닭에 내 안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 많다. 그런 나와는 달리 그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생을 완성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환갑을 훨씬 넘긴 늦은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내처 고등학교까지 진학한 것이다. 대화방에 올라온 사진은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지인들이 건네준 꽃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디서 빌려온 듯 품이 작거나 길이가 짧은 교복을 입고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의 표정이 더없이 밝고 환했다. 그 웃음이 무구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 교복을 입고 싶었을 것이다. 그 소원이 내내 마음속에 체물로 걸려 그를 서성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졸업장이 주류 사회로 이동할 수 있는 하나의 증표 역할을 하는 현실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좌절과 절망을 했을까. 그 상처는 굳이 초들어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하지만 그는 인정받는 시인이었다. 생계를 위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며 틈틈이 논밭에 나가 땅을 갈고 그렇게 주방장의 삶과, 농부의 삶과, 시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천지의 기운을 읽어내고 자연을 노래하는 사람, 멋지지 않은가. 그는 해마다 자신이 가꾸고 수확한 옥수수를 보내왔다. 튼실하게 영근 옥수수들은 유난히 단맛이 돌았다. 그 옥수수 한 알 한 알에 들어 있는 것은 햇빛 한 줌과, 그의 진득한 땀방울과, 첩첩이 포개어진 시간의 결과, 비와, 안개와, 새들의 재잘거림과, 바람의 속살거림과, 달빛과, 번개였다. 옥수수는 이를테면 그 모든 것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맛이 없을 수 있을까. 그냥 이제까지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살아도 멋진 삶이었다. 그냥 시인의 삶으로, 주방장의 시간으로, 혹은 농부로 말이다. 짜장면을 볶다가 문득 마음속에 출렁이는 시심을 이기지 못하겠거든 각혈하듯 시를 짓고, 밭에 나가 흙을 뒤집다가 잠깐 그늘 아래 들어 기타 치며 자연을 노래해도 좋을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희랍인 조르바가 보이기도 했다. 하긴 시인의 삶과 농부의 삶이 별개일까. 다 같은 것을. 그렇게 하나하나 꿈을 이루며 자기 삶의 이력을 넓혀가고 있는 그가 건강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래오래 사람들에게 따듯한 한 끼 밥을 내주고, 밭을 갈고, 삶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우리 곁에 있으면 좋겠다. 그가 말아주는 짬뽕 한 그릇이 먹고 싶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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