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힙'하진 않지만 '딥'한 언론"
지난달 3일, 프레시안이 20년 만에 이사장을 교체했다. 지난 2003년부터 대표를 맡아왔던 박인규 이사장이 물러나고 프레시안 공채 1기인 전홍기혜 기자가 대표로 취임한 것이다. 전홍기혜 대표는 프레시안의 ‘첫 여성 대표’이자 ‘첫 기자 출신 대표’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1973년생으로 전임과 비교하면 ‘17년 젊어진 대표’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지난 2001년 프레시안에 입사해 정치, 사회, 경제, 국제 분야를 두루 취재한 그는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하며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아이들 파는 나라’ 등의 책을 저술했다.
다만 언론 산업이 위기를 맞은 시기, 그의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수많은 인터넷 매체가 창간하고 포털 안에서 무한 경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그는 프레시안의 존재감을 되찾고, 언론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며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게 됐다. 전국 유일의 언론 협동조합이지만 그 가능성과 한계가 명확한 만큼 향후 프레시안의 방향성을 어떻게 세울지도 그의 몫이 됐다. 기자협회보는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구 프레시안 회의실에서 전홍기혜 대표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대표로서의 목표와 구상뿐 아니라 기자 전홍기혜로서의 삶도 함께 물었다. 아래는 일문일답.
-취임 소감부터 간단하게 말해 달라.
“프레시안 이전에 오마이뉴스, 인터넷 참여연대 등 인터넷 언론에서 일했다. 어떻게 보면 인터넷 언론 1세대인데 처음으로 내부에서 승진해 대표가 됐다. 인터넷 언론이 처음 창간할 때 굉장히 많은 폄훼와 비하들이 있었다. 그런 오해들을 뚫고 이제는 한국 언론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았고, 그 과정에서 프레시안이 한국의 대표적인 인터넷 언론 중 하나가 됐다는 데 나름의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고 있다. 한편으론 프레시안에선 20년 만의 대표 교체고, 또 제가 공채 1기라 그런 면에서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20년 만에 대표를 교체하게 된 계기가 있나.
“올해가 협동조합 전환한 지 딱 10년째 되는 해다. 2013년, 많은 고민들 속에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자는 제안이 적극적으로 나왔고 당시 제가 편집국장이어서 그 과정을 주도했다. 어느 조직이든 특정 시기엔 쇄신이나 혁신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협동조합 전환하고 10년 차가 된 지금 역시 어느 정도의 내부 혁신이나 쇄신이 필요한 시기였다.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박인규 이사장께서 연말에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지신 것이지만 이미 지난해 가을부터 ‘이제 너희들이 하라’는 말씀을 계속해 오셨다. 박 대표 건강은 이제 많이 회복되셨다.”
-급작스런 대표 교체라 경영인으로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 같은데.
“저희가 협동조합이어서 직원 이사가 있다. 저도 직원 이사여서 직원을 대표해 이사회에 참석해왔고 프레시안 협동조합이 어떤 식으로 경영되고 있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협동조합이라는 틀이 오히려 다른 언론사보다 기자가 경영에 더 친숙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왜냐면 저희는 1년에 한 번씩 총회를 하고, 기자들은 전부 의무적으로 대의원이기 때문이다. 협동조합 총회에선 경영과 관련된 재무제표 같은 지표가 모두 공지된다. 그래서 사실 경영에 대해선 기자들이 친숙하고 잘 알고 있다.”
-인터뷰 요청 때 ‘여성 대표’라는 점을 강조해 달라 하셨다.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나.
“언론사 채용 때 실력만으로 뽑으면 거의 여기자들이어서 고민이라는 말들을 하지 않나. 실제 최근 신입기자들을 보면 여기자들이 다수가 됐다. 그런데 간부급에선 소위 말하는 유리 천장이 아직도 존재한다. 대표만 봐도 제가 알기로 일간지는 장명수 한국일보 사장님 이후로 황정미 세계일보 부사장님 정도가 다다. 여성 대표는 항상 소수였고 유리 천장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레시안이 비록 작은 언론사지만 유리 천장이 깨지는 어떤 하나의 상징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게다가 저는 1973년생이라 상대적으로 어리다. 저희 세대에선 더 큰 언론사에서도 여성 대표들이 많이 나올 거라 기대한다. 한편으론 최근 독자들도 변화하고 언론도 변화하면서 언론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지에 대한 인식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특히 독자들과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해졌는데, 그런 면에서 여성적 리더십이 훨씬 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면 여성의 리더십은 돌봄의 리더십, 소통의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큰 위기가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굉장히 강력한 남성적 리더십, 즉 스트롱 리더가 더 잘 대응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코로나19 때도 여성이 정치 리더인 나라들이 더 잘 대응했다. 위기라는 건 아주 작은 구멍에서부터 비롯될 수 있다. 강력한 위기일수록 세세한 부분을 챙기는 여성적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와 아버지 성을 다 쓴 언론사 대표 역시 처음 아닐까 싶다. 현재 이름은 언제부터 쓰게 됐나.
“참 많은 사연이 있다. 제가 이름 네 글자를 쓰는 건 아시다시피 호주제 폐지 운동에 동참해서다. 제가 대학원 다닐 때 여성학을 전공했는데 그때부터 네 글자 이름을 썼다. 그러고 나니 제가 공적으로 쓴 글은 모두 전홍기혜라는 이름으로 나갔더라. 그래서 기자도 자연스럽게 전홍기혜라는 이름으로 시작을 했고 프레시안에서도 고맙게 이름을 계속 쓰게 해줬다. 제가 기자 초년생 때 대선 후보였던 모 정치인을 인터뷰하러 선배를 따라 간 적이 있다. 가서 보좌관에게 명함을 딱 냈는데 그때만 해도 네 글자 이름이 많지 않아서인지 명함을 보고 ‘아 우리 네 글자 이름 싫어하는데’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더라. 너무 깜짝 놀라고 민망했는데 그럴 정도로 네 글자 이름에 대한 편견이 많았던 때였다. 물론 지금도 그 편견이 없지는 않다. 어쨌든 법적인 이름은 아니니까. 그런데 사실 저는 네 글자 이름이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만 한국 사회의 획일성과도 연관돼 있다 본다. 이름은 세 글자여야 한다, 이 획일성을 깨지 마라, 네가 뭔데 유별나게 네 글자 이름을 쓰느냐. 이 반감과 편견,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어떤 측면을 제가 이름 네 글자를 가지면서 되게 많이 느꼈다. 그래서 사실 그 획일성에 약간의 균열을 내기 위해 일부러 네 글자 이름을 계속 쓰는 부분도 있다.”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할 땐 사실 기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봤다. 그런데 대학원을 졸업하려고 보니 뭔가 직업을 구해야겠는데 어떤 직업이 좋을지 고민이 되더라. 그때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에서 글 쓰는 거 좋아하고 잘하니 한번 취재를 해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했다. 막상 취재를 하고 글을 쓰니 페미니즘으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업이 기자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렇게 기자가 돼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다만 저는 언론고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마이뉴스가 굉장히 인기를 끌었을 때, 기자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인턴하게 해달라고 부탁해 오마이뉴스 인턴을 했고, 프레시안도 당시 논술과 영어 번역 시험만 보고 입사를 했다. 언론고시라는 게 영어나 국어 점수가 있어야 되지 않나. 어쨌든 소위 말하는 토익이나 토플 점수 없이 언론사에 들어가게 됐다.”
-수많은 언론 중 프레시안에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
“프레시안이 창간을 막 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그런데 제가 아는 분이 좋은 매체가 생긴다며 소개를 해주셨다. 당시 저는 참여연대 기자였는데, 사실 기자로서 약간의 갈증이 있었다. 왜냐면 참여연대는 좋은 단체고 거기서 기자로 일하는 것도 보람찼지만 사실 참여연대 기자는 참여연대에서 하는 일만 쓸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저는 좀 더 영역을 확장하고 싶었고 제 정체성은 시민단체 활동가보다 기자에 더 방점이 있었다. 다만 제가 대학원을 나와 나이도 좀 있고, 더군다나 이름도 네 글자고 그래서 나의 정체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매체들이 많지는 않을 것 같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레시안이 창간하며 지원하게 됐다. 물론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일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웃음)”
-기자 생활 중 가장 천착한 문제가 있다면 무엇인가.
“아무래도 저의 근본, 뿌리를 찾아가면 페미니즘이고 그렇게 여성과 인권, 아동 문제에 가장 천착했던 것 같다. 사실 기자 일을 하면서 프레시안 거의 모든 부서에서 일했다. 정치‧경제‧사회‧국제, 모든 부서에서 일했는데 개인적으로 기자 전홍기혜라고 했을 때 가장 역점을 뒀고 또 많은 관심을 받았던 이슈는 해외입양 문제였다. 제가 여성학 논문을 조선족 여성들의 결혼 이주를 주제로 써서 이주민, 그리고 경계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다만 해외입양 문제는 잘 몰랐는데, 우연찮은 기회에 연이 닿게 됐다. 편집국장 끝나고 암에 걸려 수술을 하고 요양을 하던 때였는데, 누워 있다 기사 한 개를 보게 됐다. 입양인 한 분이 미국에서 추방돼 한국에서 정신병원, 감옥을 전전하며 1년을 힘들게 보내다 자살했고 입양인들 커뮤니티에서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이었다. 장례식 다음 날 그 기사를 봐서, 입양인들을 지원하는 단체에 계신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사연을 묻고 그 내용을 아주 길게 기사로 썼다. 그런데 그렇게 길게 쓴 기사를 보고 국제입양으로 논문을 쓴 이경은 박사님이 전화가 왔다. 이 문제에 대해 너처럼 이해하고 기사를 쓴 사람을 못 봤다, 그러니 나를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만나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저도 이 문제를 오래 알아왔지만 이렇게 법과 제도적으로 깊게 꼬여있는지는 알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경은 박사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해외입양 문제를 그냥 안타까운 인권 문제로 접근하면 안 된다, 한국의 입양은 산업화된 일종의 시스템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6개월간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썼다. 그게 ‘한국 해외입양 65년’ 기획이었다. 해외입양인만 족히 20만명은 되지만 65년 동안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던, ‘마이너한 마이너한 마이너한’ 문제. 그 취재가 기자 생활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이었다.”
-능력 있는 기자라 프레시안을 떠날 기회도 분명 있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남은 이유가 있나.
“공채 1기여서 그런 것 같다.(웃음) 그리고 솔직히 제가 프레시안에 속해 있지 않았다면 기자 개인으로서의 성취를 이뤄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고마움 때문에 못 떠나는 것 같다. 프레시안의 가장 큰 장점은 기자 개인에게 굉장히 큰 자율권을 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기자가 어떤 이슈를 깊게 파고 싶다면 프레시안은 허용할 수 있는 최대한을 허용해준다. 다른 곳에 가면 짜인 틀, 조직의 한 구성원이 된다. 프레시안도 물론 조직이지만 구성원이 반드시 네모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곳이다. 조직에 도움이 된다면 동그라미여도 되고 세모여도 된다. 그게 프레시안의 가장 큰 장점이고 후배들에게도 우리 조직을 많이 활용하라고 말을 해준다. 단 잘해야 한다. 하고 싶다고 다 지원해줬는데 못하면 안 된다. 물론 열심히만 하면 다 잘 할 수 있다.”
-내‧외부 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언론사 경영을 맡게 됐다. 어떻게 활로를 찾을 생각인가.
“대표가 되면 비전을 말해야 하는데 솔직히 비전을 말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저희가 협동조합 전환하고 10년이 되는데, 아직도 경영적으로 안정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씀드리기가 조금 어렵다. 현재 프레시안 운영은 크게 조합비‧후원회비와 광고비, 콘텐츠 판매비 세 축으로 구성되는데, 매월 1만원 이상을 내는 조합비와 후원회비의 비율이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저희가 협동조합 전환 당시 조합원 1만명이 되면 광고 없이 운영하겠다고, 광고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겠다고 천명했는데 이제 결기만 가지고 지속 가능성을 꾀하기엔 조금 어려운 상황이 됐다. 다만 프레시안은 이제 창간 23년이 됐고 인터넷 언론으로선 최고참 중 하나다. 언론으로서 정도를 걷고 있고, 내부적으로도 편집권이 보호받고 있으며 거의 완성된 상황이다. 조합원들도 그 부분을 굉장히 잘 이해하고 있고 경영의 투명성도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협동조합이라는 틀 내에서 정말 더 이상 투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년 경영 지표가 보고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는 조금 외연을 확장해야 하지 않나, 수익 사업과 관련된 고민들을 새롭게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독립 언론의 생존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과제다. 프레시안의 자리가 한국 언론에서 가벼운 위치는 아닌 만큼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좀 더 유연하고 열린 자세로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지난 2013년 협동조합 전환을 선언했다. 올해 딱 10년이 되는데 협동조합 전환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나.
“지금의 협동조합 모양새나 조합원과의 관계 등 틀을 짜는 데 사실 기자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을 했던 기자들이 지금 편집국장, 경영국장 등 데스크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그때 시도했던 것들이 사실 다 성공하지는 못했다. 제대로 안착했느냐는 점에 있어서도 부족한 부분이 분명히 많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조합원 목표가 1만명이었는데 달성하지 못했고, 늘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을 유지해서다. 게다가 협동조합이기 때문에 갖는 한계도 많다. 투자도 못 받고 저희가 어려울 때 어떤 회사도 저희를 살 수가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전국 단위의 언론 협동조합이라는 면에서 가치가 있다고 본다. 100명의 대의원이 매년 총회를 하고 있고 올해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열린 오프라인 총회에도 거의 70분이 오셨다. 애정과 관심을 갖고 꾸준히 함께해온 그 분들이 지난 10년의 소중한 성과다. 사실 내부적으로 협동조합에 대한 많은 평가가 있다. 협동조합 운영이 쉽지가 않고 정말 많은 애로사항이 있어서 내부에선 협동조합을 계속 하는 게 맞는지 논란도 많다. 하지만 저는 협동조합이 프레시안의 굉장히 중요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어렵고 힘들지만 내부에서 계속 지켜나가야 할 정신이 아닌가, 또 독자와의 소통과 경영 투명성을 의무적으로 강제한다는 차원에서 계속 가져가야 할 정신이 아닌가 생각한다. 저희가 협동조합 전환할 때 생명‧평화‧평등‧협동이라는 기치를 만들었다. 이 기치는 제가 만들었는데 굉장히 21세기적인 가치라고 생각한다. 독자들이 정치적으로 양분화하면서 진보인지 보수인지를 언론사에 질문하고 있는데, 프레시안은 생명‧평화‧평등‧협동에 가치를 두고 있는 언론이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 가치를 당신이 진보라고 평가한다면 우리는 진보 언론이고 보수라고 평가한다면 우리는 보수 언론이 될 것이다. 협동조합 전환 당시에 시도했던 많은 실험들이 모두 성공한 건 아니지만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조합원과 후원회원이 완만한 감소세를 보인다고 들었다. 후원회원을 늘리기 위한 방책이 있나.
“후원제도를 저희가 굉장히 일찍 시작했고, 협동조합 전환했을 때도 후원금을 굉장히 중요한 저희 재원 중 하나로 설정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독자들이 직접 언론사를 후원하는 모델이 굉장히 유의미하고 새로웠는데, 지금은 구독 기반으로 바뀌어버렸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언론에 별풍선을 보내고 슈퍼챗을 보내지, 다달이 후원금이나 구독료를 내지는 않는 것 같다. 개념이 너무 바뀐 상황에서 단순히 우리 후원 회원을 많이 늘리는 것보다 어떤 다른 방식이 있는지 고민을 해야 할 시점이 됐다. 독자들은 언론을 후원하는 방식을 바꿨는데 우리는 옛날 방식을 계속 고집할 수 없어서, 그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프레시안의 존재감이 큰 시기가 있었으나 과거 얘기가 됐다. 이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나.
“물론 내부에 문제의식은 있다. 옛날에 프레시안이 존재감을 가졌던 이유는 한국 사회에 굉장히 큰 이슈, 예를 들면 한‧미FTA나 황우석 사태, 가습기 살균제 문제에서 프레시안이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새로운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기성 언론은 못 하는 혁신 모델을 보여줬는데, 최근엔 사실 그런 굵직한 기사를 못 낸 게 사실이다. 내부적으로 그에 대한 많은 반성도 있다. 그런데 경영적인 부분이 계속 안정되지 못하니 인력이 제한되고 그런 상황에서 기자들이 너무 지쳐가고 있다. 다른 매체들처럼 신입을 매년 뽑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다만 대표도, 편집국장도 바뀌면서 기존에 프레시안이 잘했던 것들에 충실하도록 다시 한 번 노력하고 있다. 필진과 외고도 새로 강화했고, 기자들도 서평을 의무적으로 쓰고 있다. 프레시안이 ‘힙(hip)’하지는 않지만 ‘딥(deep)’한 언론이다. 딥한 옛날 프레시안의 노하우를 저희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기본으로 돌아가 더욱 ‘딥딥딥딥’한 프레시안이 되겠다.”
-후배들 말 잘 들어주는 선배라고 하더라. 대표로서 조금 휘둘릴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아들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엄마가 안 무서운 줄 알지? 엄마 무서운 사람이야.’ 야단친 적도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뭘 해야 한다고 하면 꼭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 그런데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해야 되겠다는 필요성을 인지하면 꼭 하는 편이다. 편집국장 때도 그랬다. 제가 사실 시스템을 만드는 거에 좀 집착하는 편이다. 왜냐면 조직이 작을수록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으로 되기 쉽고, 그러면 사실 조직 내에서 가장 약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모든 조직, 모든 사회 구조에서 통용되는 원리라고 생각해 시스템을 만들자고 생각했는데 사실 우리처럼 작은 조직에선 그런 변화가 귀찮게 느껴질 수 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작은 조직에서도 부패가 있을 수 있고 전횡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욕심을 냈던 것 같다. 시대 변화에 맞춰 조직 내부의 세밀한 지점들에서도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다. 박 대표와 비교하면 17년 젊어진 리더십이 들어온 셈인데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유연하게 빨리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대표로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저는 프레시안이 참 좋은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좋은 언론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살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됐다. 어려움을 뚫고 계속 좋은 언론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언론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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