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치유를 위한 ‘비움의 설계’…다음 세대를 배려하다[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근대 유물 녹슨 철로 살린 공원
도시 가로지르는 ‘녹색 쾌감’
‘핫플’ 경의선 숲길과 다른 느낌
서울 노원구 공릉동 일대의 경춘선 숲길은 공원이 된 기찻길이다. 서울과 춘천을 이어온 경춘선이 2010년 복선전철화되면서 서울시가 2013년부터 공원화 사업을 진행했다. 일본 자본이 아니라 춘천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경춘선은 그 자체로 중요한 근대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철도와 역사 같은 근대산업시설을 보존하면서 그간 소음 등으로 고통받던 지역 주민을 위한 일상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디자인 과욕을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식재한 식물들이 건조한 도시 환경 속에서 빛을 발한다. 그리 넓지 않은 안정적인 폭의 숲길은 좌우 양쪽 어디서나 접근이 쉽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숲길을 걷기 위해 들어오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나서도록 되어 있다.
경춘선 숲길을 “가장 애착을 갖는 작업”으로 손꼽는 조경가 정영선은 “걷는 생활”을 위해 이곳을 만들었다. 집 가까이 걷는 곳이 부족한 서울, 더구나 공간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은 서울 북동쪽 외곽에 있는 이 공원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쾌감이 있다. 같은 폐철길 공원이지만 이른바 ‘핫플레이스’로 떠올라 떠들썩하고 머물 곳이 많은 경의선 숲길과는 다르다.
이곳은 위치 때문인지 외지인보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더 많다. 집에서 마른세수만 하고 추리닝 차림으로 나와도 어색하지 않은 장소. 그렇게 편한 차림으로 걷다 보면 푸르른 나무와 화사한 꽃들이 회색 도시 주변부를 어루만져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춘선 숲길은 개발이 진행됐거나 보류된 숲길의 이쪽과 저쪽의 거친 경계를 부드럽게 연결한다. 길을 걷다 보니 한곳에서 한 번에 보기 힘든 다양한 연령대, 다른 성별의 사람들을 계속 스친다. 남녀노소 인간만이 아니라 반려동물과 같은 비인간까지 길 위에서 모두가 함께 머무는 순간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후 나는 공원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장소’라고 확신하게 됐다. 미술관, 도서관과 같은 도시의 중요한 공공 건축물도 공원만큼 다양한 계층의 사람과 비인간을 포용하지는 못한다. 공원만큼 진정 모두를 품는 장소가 또 있을까?
채움의 건축·비움의 조경 조화
41년생 조경가의 ‘최애 작품’
1941년생 조경가의 50년 포트폴리오
경춘선 숲길을 설계한 정영선은 1941년생의 현역 조경가다. 그는 86아시안게임 기념공원, 88올림픽공원, 93대전EXPO공원, 여의도 샛강공원, 선유도공원 등 우리나라의 대표 공원을 설계했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그는 196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1965년 창간된 여성교양문화잡지 ‘주부생활’ 기자로 활동했다. 창간 직후부터 기자로 일했던 정영선은 주택 전문 기자로서 김수근, 김중업, 나상기 등 당대 주요 건축가들이 설계한 집을 취재하며 건축가들과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집 안팎의 사물과 생물들을 탐구하고 글을 썼다. 기자 생활을 마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에 입학해 1회 졸업생이 됐다. 1980년에는 국토개발기술사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 기술사가 됐다. 청주대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87년에 조경설계 서안을 설립했다.
그는 현재까지 조경설계 서안의 대표로 일하며 공공 프로젝트뿐 아니라 기업 시설과 개인 정원 등 규모와 결이 다른 다양한 공간들을 만들고 있다. 그를 널리 알린 것은 규모가 큰 도시 공원이지만, 용산 아모레퍼시픽 본사 정원처럼 장기간 신뢰와 협업을 통해 완성된 민간 프로젝트도 인상 깊다. 이 작업은 “사옥 내외부 공간 곳곳에 자연과 도시, 지역사회와 기업 간의 교감과 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 공간들을 조성했다”고 평가받았다.
한국 조경은 건축처럼 개발 드라이브의 명암이 드리운다. 배정한은 <한국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에서 “한국 현대 조경의 지형이 내부적인 성찰과 성장에 의해 자생적으로 형성되지 못했고, 정치적 상황, 도시 및 개발 정책, 전통에 대한 강요, 대중의 획일적 취향과 같은 외부적 지식에 의해 실천의 방향이 좌우되었다”고 설명한다. 정영선은 이러한 한국 현대 조경의 초창기 경험을 공유하면서도 최근 개인의 기억과 취향을 중시하는 치유의 장소로 입지를 다지는 조경도 다스려왔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한국에서 조경이 매우 트렌디한 장르로 각광받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이후 열린 공간 설계는 도시, 건축, 실내건축의 핵심이 되었는데, 최근 경향은 보다 대중적인 관심이 두드러진다. 여러 상업공간 및 전시에서 조경은 인기 있는 주제이자 장르다. 반려식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식물이 만드는 특별한 공간 분위기와 감수성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정영선은 이러한 현상에서도 소외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작업만 진행했던 그를 유행에 민감한 브랜드 공간 및 전시가 초대하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인기 많은 북촌 설화수의 집이나 디올 성수의 조경 작업, 문화공간 피크닉에서 열린 ‘정원 만들기’(2021) 전시 등에서 80세가 넘은 노장의 동시대적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정영선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 영화도 올해 말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그의 삶과 작업을 담은 <땅에 쓰는 시>(가제)는 건축 전문 영화·영상 제작사 기린그림이 제작하고 정다운 감독이 연출했다. 이 영화는 지난해 세계조경가대회에서 사전 공개돼 주목을 받았다.
“조경은 시간이 완성하는 행위
사람이 설계, 하늘이 작동시켜”
원칙처럼 지킨 여백의 디자인
대안적 건축으로서 조경
대중사회의 조경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건조 환경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조경과 인접 분야에 있는 건축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담겨 있다. 조경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어로 그 어원부터 건축(Architecture)과 불가분의 관계다. 건축의 주재료는 콘크리트·철과 같은 무생물이고 조경은 사시사철 모습을 달리하는 생물을 다룬다. 정영선은 “건축가는 땅을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단단한 기반으로 여기지만, 조경가에게 땅은 식물을 자라게 하는 생명체”라고 설명한다.
이 두 분야의 합은 우리의 아름답고 쾌적한 거주 환경의 질을 좌우한다. 인공의 풍경을 만드는 건축, 그리고 자연의 풍경을 여는 조경은 최근 서로를 닮아가고 있어 명확하게 언어로 나누기 쉽지 않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건축은 채움을, 조경은 비움을 담당해왔다. 조경은 무질서하게 부수고 채우는 특정 건축에 대한 대항이자 대안으로 여겨진다.
정영선은 그간 수많은 건축가와 작업하며 장소의 여백을 지키는 디자인을 고수해왔다. 일정한 용적률을 채워 수익을 내야 하는 건축 행위 특성상 일반적으로 건축물 설계가 선행된 뒤 남은 빈 곳에 조경 작업이 진행되기 때문에 조경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적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는 숙련된 경험을 토대로 건축에 지지 않고 건축과 조경이 서로 존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왔다. 조성룡, 승효상, 최욱, 조민석과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뿐 아니라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알바로 시자, 데이비드 치퍼필드 등 국제적인 건축가와의 협업을 계속하고 있다.
공간의 여지를 계획하는 조경 행위는 지속적인 돌봄을 필요로 한다. 살아 있는 생물을 다루는 조경은 계절에 따라 매번 변화하는 상황을 알아야 한다. “조경은 시간이 완성하는 행위”라고 강조하는 정영선은 “설계하는 사람은 나지만, 이를 작동시키는 건 하늘의 뜻으로 우연성에 기댄다”고 그의 설계 과정을 설명한다. 그렇게 그가 완성한 조경 도면은 흐린 경계에 다양한 색채들이 가득하다. 일반적인 건축 도면이 명료한 검은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가 그린 도면은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 선들을 찬찬히 뜯어보니 사계절의 변화를 조금씩 담은 중첩된 면들이 발견된다. 건축가의 검고 단단한 선 위에 조경가의 부드럽고 다채로운 면이 겹쳐지는 순간을 상상해본다.
과수원서 자란 유년의 경험이
‘자연의 기억 물려주기’ 중시
다음 세대를 수호하는 여백의 디자인
정영선은 나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다른 인터뷰 자리에서도 할아버지의 과수원을 자주 언급했다. 그는 커다란 바위가 일곱 개 있어 칠암농원이라 불렀던 과수원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자기 작업과 삶의 근원이라고 종종 말해왔다. 교사로 일한 아버지가 근무한 학교의 정원과 집 앞에 있던 나무 한 그루도 정영선의 마음을 지금까지 흔들고 있다. 정영선은 스스로 열심히 가꾼 자택 정원에서 흙과 놀고 있는 손자 사진을 보여주며 자기 할아버지의 정원으로부터 이어온 4대에 걸친 자연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위로부터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지 생각하게 했다. 여백을 만드는 디자인 행위인 조경은 다음 세대를 위해 수호해야 할 영역을 지키는 적극적인 작업일지도 모른다. 물려줄 수 있는 장소의 유산을 보호하고 지키는 행위가 조경이라는 또 다른 건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저 자연이 머무는 여지를 만들어주고, 그 공간을 앞으로 어떻게 다르게 쓸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다음 세대가 하면 된다.
할아버지의 정원부터 손자가 노니는 자기 정원에 이르는 긴 시간을 상상하며 나는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아니 에르노의 인터뷰집 <진정한 장소>에 담긴 한 구절을 떠올렸다. 마침 경춘선 숲길의 1구간부터 3구간까지 힘차게 걸었던 날 읽은 책이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를 구성하는 내면의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모아야 해요. 저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받은 적이 없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면의 박물관이 모두를 위한 장소가 되기까지 시간은 계속 변화하고 흘러간다.
■정다영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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