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당무개입 논란 다시 불지핀 ‘태영호 녹취록’···‘지어낸 말’ 해명 통할까
이진복 대통령실 정무수석이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에게 내년 총선 공천을 거론하며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징용) 피해 배상안을 옹호하는 발언을 요청했다는 태 최고위원 음성 녹취 공개의 파장이 확산하고 있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 지도부는 2일 태 최고위원이 사실이 아닌 내용을 지어내 말한 것이라며 사태 조기 수습을 시도했다. 하지만 비윤석열계를 중심으로 엄정한 수사와 태 최고위원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당 내에서는 지난 전당대회를 지배한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 논란이 되살아나 겨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김기현 대표 체제가 다시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전날 MBC가 보도한 태 최고위원 발언 녹취는 국민의힘이 새 지도부를 선출한 3·8 전당대회 바로 다음날인 3월9일 태 최고위원이 의원실 보좌진을 모아놓고 한 말이다. 이날 태 최고위원은 이 수석을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이 수석으로부터 ‘오늘 최고위원회의에서 더불어민주당의 한·일관계 소재 윤석열 대통령 공격에 대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취지의 질책성 발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태 최고위원은 이 수석이 ‘당신이 정부 정책 옹호성 발언을 하면 내가 윤 대통령에게 보고할 경우 공천은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고도 했다.
당시는 정부가 강제징용 해법으로 제시한 ‘제3자 변제안’을 두고 야권과 시민사회에서 거센 비판이 제기되던 시점이었다. 대통령실이 공천을 압박하며 여당 지도부에 이에 대한 방어를 요청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태 최고위원은 이 수석을 만난 이후 윤석열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을 옹호하고 이를 비판하는 민주당에 대한 강경 반응을 쏟아냈다.
태 최고위원 발언 내용이 사실일 경우 대통령실이 여당 의원에게 내년 총선 공천을 미끼로 압박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어 파장이 커질 수 있다. 이 수석이 비슷한 취지의 말을 다른 여당 인사들에게도 했을 가능성이 여당 내에서는 제기된다. 여당 우세지역인 서울 강남갑이 지역구인 태 최고위원은 이번 총선에서 같은 지역구 공천을 받기가 쉽지 않을 거란 전망이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탈북 외교관 출신인 그가 북한 접경지라는 상징성이 있는 경기 파주 등으로 지역구를 옮길 거란 얘기도 나왔다. 태 최고위원이 전당대회에 출마해 당 지도부에 입성하려 한 것도 공천 불안감 때문이란 추정이 많았다.
당시 태 최고위원이 소집한 자리에 참석했던 보좌진 중 한 명이 녹음한 파일이 언론에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태 최고위원은 이번 보도와 유사한 현안이 있을 때면 수시로 보좌진을 소집해 지시하고 의견을 묻는다고 한다. 많게는 한 주에 20회가 넘게 회의를 하는데, 태 최고위원이 자아·상호 비판을 요구할 때가 많아 북한식 ‘총화’ 같다는 비판이 나왔다. 보좌진은 이런 낯선 분위기와 과도한 업무량 등에 적응하지 못해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현재도 의원실 세 자리에 대한 채용 공고가 국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다. 태 최고위원을 잘 아는 인사들은 이러한 사례들을 근거로 녹취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한 관계자는 “태 최고위원 성격상 (이 수석을 만난 뒤) 바로 소집을 했을 것”이라며 “(태 최고위원 발언이) 과장됐을 수는 있지만 사실이 아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지난 전당대회 과정에서의 대통령실 개입 논란을 상기시킨다. 당시 대통령실 개입으로 유승민·나경원 전 의원이 차례로 당대표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안철수 의원이 지지율 1위로 떠오르자 윤 대통령이 “국정 운영의 방해꾼이자 적”이란 말까지 써가며 기어이 안 의원을 2위로 떨어뜨렸다. 이 수석은 당시 안 의원을 겨냥해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라는 경고를 남겼다.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무리하게 전당대회에 개입한 것은 결국 원하는 인물을 당대표에 앉혀 내년 총선 공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이유란 해석이 나왔다.
김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지도부는 “이 수석은 본 의원과 만난 자리에서 한·일관계 문제나 공천 문제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전혀 없다”며 자신의 과거 발언을 부인한 태 최고위원 해명에 무게를 실으면서 대통령실의 공천 개입 의혹으로 확산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유승민 전 의원, 김웅·허은아 의원 등 비윤계에서는 대통령실의 공천개입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등 엄정한 진상조사와 태 최고위원에 대한 징계 및 자진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벌써 일부 여당 의원들은 내년 총선 공천에 대통령실이 개입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자칫 새누리당 시절인 2016년 총선 공천을 두고 벌어진 ‘옥새 파동’ 같은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게 여당 지도부 걱정이다. 대통령실의 개입 우려가 확산하면 당 지도부 리더십도 흔들릴 수 있다.
당 지도부에서는 제주 4·3사건 김일성 지시설 등 설화로 이미 당 중앙윤리위원회가 징계 절차에 착수한 태 최고위원에 대한 격앙된 목소리가 나온다. 겨우 당을 안정화시키고 민생에 집중하려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이에 태 최고위원이 최소한 내년 총선 공천을 받지 못할 수준의 징계를 받게 될 거란 전망이 제기된다. 국민의힘 핵심 관계자는 “태 최고위원의 해명은 이해가 불가능하다”며 “이번 사안으로 윤리위가 따로 징계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진행되는 징계 수위가 가중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리위는 이미 사태를 예의주시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문광호 기자 moonlit@kyunghyang.com, 조문희 기자 moony@kyunghyang.com, 조미덥 기자 zor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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