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 피해’ 경비원 사망 50일···‘그 아파트’는 달라진 게 없다
‘쪼개기 계약’ 안 고쳐져 불안한 앞날
계약 종료된 전 경비대장 ‘출근 투쟁’
여론 관심 밖에서 경비원들 고통 계속
“고인이 된 경비원의 뜻은 잊혔습니다. 변화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경비원들은 여전히 3개월짜리 계약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2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앞. 이 아파트에서 경비대장으로 근무했던 이모씨는 경향신문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지난 3월 말 경비용역업체로부터 계약종료 통보를 받은 뒤 이 아파트에서 매일 ‘출근 투쟁’을 벌이고 있다. 70대 경비원 박모씨가 지난 3월14일 ‘갑질 피해’를 호소하며 투신해 사망한 바로 그 아파트다.
박씨가 ‘관리소장에게 갑질을 당했다’는 호소문을 남기고 사망한 지 이날로 50일째다. 박씨의 죽음 직후 주목받았던 이 아파트 사건은 이제 여론의 관심에서 밀려났지만 동료 경비원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기자와 만난 경비원과 주민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박씨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지목된 관리소장 A씨는 여전히 아파트 사무실로 출근한다. 5년째 이곳에서 일해온 경비원 홍모씨(69)는 “(사건 발생 초기에는) 관리소장이 출근을 안 해 그만둔 줄 알았다”면서 “알고 보니 3주간 휴가를 다녀왔던 것”이라고 했다. 이씨도 “사람이 죽었는데 이렇게까지 오래 버틸 줄 몰랐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행동”이라고 했다.
이날 경향신문은 A씨를 만나기 위해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았으나 그는 답변을 피하며 “묻지 말라”고만 했다.
‘관리소장 퇴진’을 외쳤던 이씨가 도리어 일터에서 밀려났다. 그는 지난 3월 말 경비용역업체로부터 ‘근로계약 종료’ 통보를 받았다. 이씨는 “(사건 공론화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일종의 ‘표적 해고’를 당한 것”이라며 “동료가 그렇게 죽었는데 어떻게 그만할 수 있나. 관리소장이 물러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했다. 이씨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근로계약 갱신거절의 합리적 사유가 없다”는 내용으로 ‘부당해고 구제’ 신청서를 제출했다. 얼마 전에는 생계유지를 위해 실업급여도 신청했다.
경비원들을 고용 불안에 시달리게 만드는 ‘쪼개기 계약’도 여전하다. 사건 당시 이 아파트 경비원들의 근로계약서가 공개되면서 이들이 3개월짜리 단기 계약을 맺은 사실이 알려졌다. 계약 기간이 짧으면 이씨처럼 ‘사실상 해고’에 몰려도 문제를 제기하기 힘들다. 사측이 “계약기간 종료”라고 하면 대응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투신 사건 이후 경비원들은 용역업체 측에 계약 기간을 ‘1년 단위’로 늘려달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4월 시작된 근로계약은 다음달이면 만료된다. 계약 방식 등에 불만을 품고 최근 이 아파트를 떠난 경비원도 10명이 넘는다. 경비원 최모씨(74)는 “먹고 살려면 다니던 곳을 계속 다닐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로서는 주어진 상황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홍씨도 “나이 든 사람들은 가뜩이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힘든데 우리가 어딜 가겠나”라며 “3개월 계약을 하든지, 나가든지 양자택일에 몰려 있다”고 했다.
아파트 입주민 간 갈등의 골도 깊어지고 있다. 일부 주민들은 입주자 700여명(약 70%)의 서명을 받아 아파트 위탁관리업체에 “비극적 사고에 대해 업체가 사과하고 (관리소장을) 즉각 해임하라”고 내용증명을 보냈다. 또 100여명(10%) 주민의 동의를 받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에 대한 해임요청서를 아파트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다. 아파트 주민 B씨는 “입대의 회장의 직무가 정지되자 입대의 측은 선관위 전원 해촉으로 맞서고 있다”면서 “입대의가 관리소장과 한 몸으로 움직이면서 횡포를 계속하고 있다”고 했다.
경찰과 고용노동부는 경비원 투신 사건을 아직 수사 중이다. 서울 수서경찰서 관계자는 “경비원 수십명을 비롯해 다수의 참고인 진술을 받았으나 아직 위법행위를 찾지 못한 상황”이라며 “유족 측으로부터 고소장이 접수된 바는 없다”고 했다. 고용노동부 강남지청 관계자는 “직장내괴롭힘과 불법파견 여부를 살폈으나 법리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있어 추가 검토 중”이라고 했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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