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임대인이 ‘ㄱㅇㅎ’인 전세사기 피해자 찾습니다”

류인하 기자 2023. 5. 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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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왕’ ‘건축왕’ 등 알려진 것 이외
별도 사건 분류 안 된 사기 피해자들
정부가 제시한 ‘피해자성’ 입증하고
사건 접수 위해 ‘같은 임대인 찾기’
이와중에 명예훼손 걸릴까 ‘초성’만
전세사기피해자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파이낸스빌딩 앞에서 정부와 국회의 실효성 있는 피해자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A씨는 지난달 27일 정부의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대책 발표 이후 온라인 커뮤니티와 단체대화방 등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자신과 같은 임대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을 모으고 있다.

그는 현재까지 자신과 동일한 임대인과 계약한 임차인 12명을 모았지만 피해규모가 작은 것 같아 걱정이 많다. A씨는 “피해자가 100명, 200명씩 되는 건도 부지기수라며 지금 이정도 규모로 경찰서에 (사건을) 가져가봤자 접수도 안 해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집주인이 잠적하고 연락이 안 되면 이 자체가 전세사기지, 도대체 뭘 더 증명하라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일 경향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빌라왕’ 건축왕‘ 등 이미 이름이 알려진 전세사기 외에 정부가 별도의 전세사기 사건으로 분류하지 않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저마다 ‘같은 임대인 찾기’를 하고 있다.

인천 미추홀구처럼 한 동 전체가 피해자인 경우가 아닌 소규모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경우 집단화가 어려워 피해지역과 임대인 이름 초성을 단톡방 등에 공유하는 방식으로 같은 피해자를 모으고 있다. 예컨대 ‘강서구 ㄱㅇㅎ’ 식이다.

임대인의 실명을 쓰지 않는 이유는 실명을 단톡방에 공유할 경우 자칫 명예훼손 등의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대책을 발표하면서 전제조건으로 정부가 제시한 6가지 요건을 모두 갖춰야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중 두가지가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가 있을 것’ ‘수사개시 등 전세사기 의도가 있다고 판단돼야 할 것’인데 이 조건들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다. 일부 피해자 중에는 경찰에서 먼저 연락이 와 자신이 전세사기 피해자란 사실을 인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피해자가 먼저 나서야 하는 경우에는 입증도 쉽지 않다. 때문에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그나마 같은 임대인을 중심으로 모이면 상대적으로 사건 접수가 수월하고, 정부가 제시한 ‘피해자성’ 인정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피해자성’ 입증을 위해 고소를 이어가면서 경찰 업무도 과중되고 있다.

경찰관계자는 “연일 몰리는 전세사기 피해신고 처리에 다른 업무가 마비될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들어 다른 업무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전세사기 관련 사건 접수가 늘었다”면서 “최대한 (고소장이 제출된) 모든 사건을 들여다보고, 기존에 접수된 사건 가운데 동일인(인대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일부 경찰서에서는 당장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거나, 전세사기 피해자 신고 건이 아닌 전세사기 관련 사건을 돌려보내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전세사기 인정받으려 ‘동일 임대인’ 찾아나서

B씨는 최근 자신의 아들 앞으로 온 각종 보험금 및 세금통지서를 보고 아들이 깡통빌라 ‘바지사장’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B씨의 아들은 무직이다. B씨는 아들을 추궁해 그가 컨설팅업체로부터 “집도 한 채 주고, 용돈벌이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에 자신의 명의를 빌려준 사실을 알아냈다. B씨가 파악한 아들 명의의 빌라만 5채가 넘었다.

직접 경찰서를 찾아갔지만 “지금 피해자가 100명이 넘는 사건도 넘친다. 아직 피해가 직접적으로 발생한 것도 아니니 일단 돌아가시라”는 답변만 받았다. B씨는 “명의를 빌려준 아들도 잘못이 있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을 꾀어 명의를 빌려간 것 자체가 사기가 아니냐”고 했다.

정부는 이같은 지적이 계속 제기되자 지난 1일 ‘피해자성’ 요건 6가지를 4가지로 축소하는 수정안을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법안소위원회에 제출했다.

전세사기 특별법 심사를 위해 1일 국토교통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소위원회 회의에서 여야 의원들이 논의를 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국토교통부가 낸 수정안에 따르면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할 우려가 있을 것’ ‘수사가 개시되는 등 전세사기 의도가 있다고 판단돼야 할 것’ 등 2개 요건을 ‘수사개시, 임대인 등의 기망 또는 임대인이 보증금 반환할 능력 없는 자에게 임차 주택 소유권을 양도하는 경우’로 바꾸기로 했다. 국토위는 3일 다시 회의를 열어 추가심사를 한다는 계획이지만 여전히 문구가 애매모호해 야당과 최종합의를 이룰 지는 미지수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해야 전세사기로 인정한다는 등의 정부의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방안은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맞추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면서 “지원대상 피해자 범위를 최대한 확대하는 등 정부·여당의 전향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선보상 후구상’ 거부하고, 피해자 요건 완화한 정부···“미추홀구 대부분 구제”
     https://www.khan.co.kr/economy/real_estate/article/202305021508011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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