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IT] 기술유출 판례 (2) BOE-하이디스 LCD 기술유출 분쟁

2023. 5. 2. 15:3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판례’란 법원이 특정 소송에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내린 판단입니다. 법원은 이 판례를 유사한 종류의 사건을 재판할 때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합니다. IT 분야는 기술의 발전 속도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의 속도보다 현저히 빠른 특성을 보여 판례가 비교적 부족합니다. 법조인들이 IT 관련 송사를 까다로워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을 거치며, IT 분야에도 참고할 만한 판례들이 속속 쌓이고 있습니다. IT동아는 법무법인 주원 홍석현 변호사와 함께 주목할 만한 IT 관련 사건과 분쟁 결과를 판례로 살펴보는 [그때 그 IT] 기고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출처=엔바토엘리먼츠

‘BOE-하이디스 LCD 기술유출 판례’로 본 기업인수합병을 이용한 해외 기술유출 사례(서울중앙지방법원 2009. 2. 17. 선고 2008고단4524 판결 등)

“기술자료 4,331건에 대한 시장교환 가격은 얼마나 될까?”


한국이 2004년부터 무려 17년간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지켜왔던 산업이 있습니다. 바로 ‘디스플레이’입니다.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에 따르면, 2017년도 한국의 디스플레이 세계 시장 점유율은 44.4%로, 당시 2위 대만(22.9%), 3위 중국(21%)에 비해 압도적인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점유율이 점점 줄어들더니, 2021년에는 중국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시장 점유율 중국 41.3%, 한국 33.3%).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전폭적인 정부 지원에 힘입어 디스플레이 중 액정표시장치(LCD) 분야의 점유율을 크게 늘린 결과입니다.

현재 글로벌 LCD 매출 1위 기업은 중국 디스플레이 제조기업인 BOE입니다. BOE는 설립 초기 일본 기업과 함께 TV 브라운관(CRT) 생산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이었는데, 2002년 11월경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서 분사한 LCD 부문 자회사인 하이디스를 인수해 LCD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BOE는 하이디스 인수 다음 해인 2003년경, 하이디스가 BOE그룹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주력 기업이 됐다며, 하이디스 매출 8,000여억원, 영업이익 1,000여억원을 달성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2006년 9월경 돌연 하이디스를 부도 처리한 후 중국으로 철수했습니다.

BOE 경영 불과 3년 만에 하이디스는 한 해 약 1,000억원의 적자(2005년 기준)를 내는 기업으로 전락한 상태였고, 하이디스의 자금 약 1,500억원과 국내 인력 100여명이 중국 현지 LCD 생산 공장 설립하는 데 투입된 사실이 세간에 알려졌습니다. 또 BOE는 하이디스 인수 당시 약속한 투자를 사실상 한 푼도 하지 않았는데, 하이디스 인수자금의 상당 부분을 중국 내 생산시설 재투자 명목으로 회수해 간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처음부터 하이디스의 첨단 LCD 기술을 중국으로 빼돌리기 위해 기업인수합병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소위 ‘먹튀’ 논란이 일었습니다.

2008년 검찰수사 결과, BOE의 기술 먹튀 우려는 사실로 확인이 됐습니다. BOE는 2004년 7월경 하이디스와 일부 LCD 기술에 대한 기술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 후 이를 명분 삼아 양사의 전산망을 통합, 중국인 임직원들이 하이디스의 개발 서버에 저장된 기술자료 전체(개발 중인 것과 개발 완료된 것 모두 포함)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으로 누출된 하이디스의 기술자료는 총 4,331건으로, 그중 TFT-LCD 핵심 기술자료는 200여건에 달했습니다.

검찰은 기술유출을 방치한 하이디스 대표이사와 개발센터장에 대해 업무상 배임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당시 법령상 기업인수합병(M&A)을 통한 기술이전(유출)에 대해서는 별도의 처벌규정이 있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국가 핵심 기술유출 사건임을 감안해 검찰이 적극 개입한 것으로, 법원에서도 하이디스 임직원에 대해 업무상 배임 혐의를 인정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됐었습니다.
출처=하이디스 홈페이지

법원은 기소된 하이디스 임직원들이 개발 서버를 중국 임직원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4,331건의 기술자료를 누설, BOE에 대해서는 ‘해당 기술자료의 시장교환가격 상당의 재산상 이익’을, 하이디스에 대해서는 동액 상당의 손해를 발생시켰다며 업무상배임죄를 인정했습니다(서울중앙지법 2008고단4524, 2009노700, 대법원 2009도11729).

다만, 피고인들에 대해 실형이 아니라 집행유예가 선고됐습니다. 법원은 중국인 임직원들은 기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처벌의 형평성을 고려할 필요 있는 점, 피고인들이 직접적으로 취득한 이익이 거의 없는 점, 구체적인 피해액이 산정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판시했는데, 특히 피해액 산정과 관련해서는 “누설된 기술자료가 대부분 피해 회사에서 과거에 생산했던 제품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장교환가격의 산정이 쉽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법리적으로는 피해액을 측정할 수 없다는 사정을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술유출로 인한 피해 예상액을 특정 시점에서 산정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며, BOE 하이디스 LCD 기술유출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피해 회사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국가 핵심 기술유출 사건에 있어서는 보다 전향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입니다.

대검찰청은 지난 4월 26일 ‘기술유출 범죄 검찰 사건처리기준 개정안’을 마련해 국가 핵심 기술유출 범죄에 대해 엄정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해당 개정안은 국가 핵심 기술의 국외 유출 주요 가담자에 대해서는 구속수사를 원칙으로 하고 기본 구형을 상향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술유출로 인한 피해 규모도 주요 양형 인자로 도입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피해 규모 산정기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지만,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적극 반영하면서도 합리성이 있는 산정 기준이길 기대해 봅니다.

다음 기고에서는 2009년 11월경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로 사회적 이슈가 됐던 쌍용자동차(현 KG모빌리티)의 하이브리드차 핵심 기술유출 사건 관련 판례(서울중앙지방법원 2012. 8. 10. 선고 2012노846 판결 등)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글 / 홍석현 법무법인 주원 변호사
홍석현 변호사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제4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로 일하다가, 현재는 법무법인 주원 파트너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정리 / 동아닷컴 IT전문 김동진 기자(kdj@it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