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연의 닥터스] “해외 원정수술 받아야 했던 성소수자에 의료 인프라 제공할 것”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는 의료강국이라 불리는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불모지였다. 2013년까지 국내에서 출판된 성소수자 건강 관련 논문은 128편에 불과했다. 의대에서 성소수자 의료에 관한 선택과목이 처음으로 개설된 것은 불과 2년 전이다. 2020년대에 이르러서도 성소수자를 위한 의료인프라와 연구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에서 성소수자 수술에 대한 기록이 발생한 것은 반세기가 넘었다. 1955년 경기 양평군과 화성군에 사는 두 명의 환자가 성확정 수술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에 국내에서도 수술이 이뤄지기 시작했지만 많은 환자들이 바다를 건너가 외국의 의사들에게 수술을 의뢰하고 있다.
성소수자 의료가 음지에 머무르는 동안 다양한 부작용이 발생해왔다. 타국에서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막대한 비용을 치르는 것은 물론 수술 후 적절한 관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해외 원정수술을 가는 과정에서 중개인이 부당하게 수수료를 편취하는 일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술 후 후유증을 앓아도 처치가 가능한 전문가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황나현 고려대안암병원 성형외과 교수는 그동안 소외됐던 국내 성소수자 의료인프라를 크게 개선한 인물로 꼽힌다. 2021년 고려대안암병원이 국내 대학병원 최초로 성소수자를 위한 전문 클리닉을 개설하는 데 기여했으며 2022년에는 국내 최초로 소장을 이용한 성확정수술을 성공적으로 집도했다. 성소수자 의료와 관련해 올바른 의료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전문가 모임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늘에 머물렀던 성소수자 의료의 발전에 힘을 쏟고 있는 황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처음 성소수자 의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의대생 시절, 우연한 기회로 송소수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곧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친해지게 됐다. 의대에 다닌다는 것을 말하자 여러 사람들이 ‘국내에서 성소수자를 돕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형외과 진로를 선택한 이후 어떤 사람들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은지 자신에게 물었을 때 그때의 기억이 났다. 한국에서 필요한 의료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성소수자 의료에 대한 관심은 우연하고 개인적인 사건에서 출발한 것 같다.”
-성소수자 의료는 한국에서 관련 인프라가 미비했다. 관련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성형외과 전공의 수련을 마친 이후 성확정 수술을 배우기 위해 해외 전문가들을 수소문했다. 성확정수술이 가장 발달한 벨기에와 태국이다. 먼저 인연이 닿게 된 곳은 벨기에였다. 이 분야에서 유명한 벨기에 겐트대의 스텐 몬스트리 교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한국에서 연락이 온 것은 처음이라며 반겼다.그렇게 2013년 한국 의료진 처음으로 벨기에에 건너가 대학병원에서 이뤄지는 성확정수술 체계를 배웠다. 이 시기에 배운 수술 전후 관리체계는 이후 고대안암병원의 성확정수술 협진체계를 구성하는 데 많은 참고가 됐다.
클리닉 개소 후 태국에서는 성확정수술의 최신 술기를 배우기 위해 태국으로 갔다. 태국은 성확정수술이 발달한 나라 중 하나다. 한국의 환자들이 수술을 받기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만큼 일부 현지 의료진은 자신의 술기를 외국의 의사에게 전수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때 만난 스승이 성확정수술의 대가인 방콕 시리로지 병원의 산구안 쿠나폰 박사님이다. 한국의 환자들이 타국에서 어렵게 수술을 받는 상황에 공감하고 자신의 지식을 아낌없이 전수해주셨다.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의 소명의식이었다.”
-성소수자 의료를 보수적인 대학병원에서 시작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사실 한국의 많은 의사들이 성소수자 의료인프라가 부족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 90년대부터 성소수자를 위한 진료와 수술을 하는 병원들이 있었지만 다만 상급종합병원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치료팀이 꾸려지거나 클리닉이 개설되지는 못했다. 벨기에와 태국에서 수학한 이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병원의 많은 선배, 후배, 동료 의료진이 이러한 상황에 공감해줬다. 변화한 시대상에 경영진이 동감하고 결단을 내려 2021년 국내 최초 대학병원 성소수자 클리닉을 개설할 수 있었다. 환자들이 소외된 분야에서 선도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대형의료기관의 책임감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대학병원을 나와 개원을 해 환자들을 돕는 방안도 고민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대학병원 차원에서 성소수자 의료체계가 필요한 이유는.
“한국에서 성확정 수술은 일찍이 충분한 실력을 갖춘 의료진이 수술을 실시하지만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수술 전후 관리를 위한 의료인프라가 대학병원과 비교하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분야가 발전한 벨기에나 태국에서는 수술법 뿐만 아니라 수술 전후 다학제 방식의 전인적 관리체계가 함께 발달했다. 더 양질의 치료결과를 얻기 위해선 대형병원급 의료기관이 주도적으로 나서 전후관리체계를 구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성확정 수술은 다학제 진료가 중요한 수술이기도 하다. 수술을 받기 전후 정신건강의학과의 상담치료와 내분비내과의 호르몬 치료 등 다양한 진료과의 협진이 필요하다. 성확정수술 자체도 전신마취가 이뤄지는 큰 수술로 마취통증의학과 의료진이 협업해야 한다. 수술을 받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부작용 관찰과 처치가 필수적이다. 일련의 과정을 환자 편의를 위해 단일 의료기관에서 진행하기 위해선 대형병원급 의료기관의 인프라가 필요하다.”
-성확정 수술의 방법도 다양하다.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수술법의 장점은.
“성확정 수술은 복막, 대장, 소장, 피부이식 등 다양한 방식이 있다. 각 수술법마다 장단점이 있다. 환자의 희망과 신체적 여건에 따라 개인마다 가장 적합한 수술법은 다르다. 태국에선 주로 대장과 소장을 통해 수술을 시행한다. 대장을 이용한 수술의 경우 수술 후 장액이 과잉 분비돼 불편감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 소장의 경우 상대적으로 통증 부작용의 위험이 낮고 수술 결과에 대한 심미적 만족도가 높은 장점이 있다. 소장을 이용한 수술법은 태국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발전했는데 앞서 언급한 쿠나폰 박사님이 이 분야의 전문가였다. 환자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이 개설되고 약 1년 반이 지났다. 그동안 환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모든 수술사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별도의 홍보를 진행하지 않았는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입소문을 타고 환자들이 내원하고 있다. 그만큼 이 분야에서 미충족 의료수요가 있었다는 의미다. 고대안암병원 젠더클리닉은 성소수자 의료분야에서 앞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기대한다. 의료선진국으로 불리는 한국이 이 분야에서도 보다 큰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성소수자 의료 발전을 위해 병원 안팎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한국성소수자 의료연구회에 참여하고 있다. 성소수자 관련 제도나 최신지견 번역물 제작에 창ㅁ여하고 있다. 해외 학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수술법을 주제로 세미나를 지속적으로 주최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대화를 나누며 성소수자 의료의 종합적인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특히 제도나 법과 관련한 분야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연구도 성소수자 의료 미충족 실태가 주제다. 국내 성소수자 환자들의 파악되지 않은 수술 현황을 확인하는 것이 목표다. 성확정수술을 받은 많은 환자들이 언제 수술을 받고 어떻게 후속조치가 이뤄졌는지 체계적인 데이터가 없는 실정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축적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의료기록이 단절된 환자들의 규모를 파악할 것이다. 이런 작업은 성소수자 의료에서 미충족 정확한 실태를 아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성소수자 의료 발전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과 환자들에게 한마디.
“대학병원에서 더 많은 젠더클리닉이 생기길 바란다. 성소수자 환자들이 전국 어디에서나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받게 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다. 성소수자 의료는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편하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주제다. 의료진과 의료진, 의료진과 환자, 환자와 환자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줘야 한다. 젊은 의사들의 경우 이 분야의 진로를 선택하는 결정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든 자신의 뜻이 있다면 용기를 갖고 도전하는 것을 권한다. 많은 보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박정연 기자 hess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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