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모·한운사 등 민족문학 재건의지로 뭉친 6인의 문인들
(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 수면(睡眠)의 강을 건너 / (중략) / 깜깜한 절벽 /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치곤 / 까무라쳐 돌아온다." (정한모 '나비의 여행-아가의 방(房)' 중에서)
시인이자 국문학자로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 영화 '빨간 마후라'의 각본을 쓴 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였던 한운사 등 일제 강점기를 거쳐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겪은 1923년생 문학인 6명을 기리는 문학제가 마련된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는 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2023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를 11∼12일 개최한다고 밝혔다.
대산문화재단과 작가회의가 2001년부터 열고 있는 이 문학제의 올해 주제는 '발견과 확산: 지역, 매체, 장르 그리고 독자'이다. 대상 작가는 1923년에 태어난 박용구, 방기환, 정한모, 한성기, 한운사, 홍구범.
이들은 대체로 해방기와 맞물려 20대 초중반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학 세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그동안 강제로 빼앗겼던 모국어를 되찾은 문인들은 겨레 문학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로 해방공간에서 문학 활동에 나섰다.
한국작가회의 윤정모 이사장(소설가)은 "이분들이 살아계실 때 만나거나 작품을 읽고 배운 적이 있는데 여기서 이렇게 다시 뵙게 돼 감개무량하다"면서 "이번 문학제는 선배 문인들과 현재 우리들, 그리고 미래의 문학도들이 얼싸안고 함께 신나게 나아가는 마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구심점은 계간 문학지 '문예'(文藝)였다. 홍구범과 박용구가 '문예'의 실무 편집자로 일했고, 한성기가 이 잡지로 등단했으며, 방기환도 '문예'의 주요 필자였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좋은 문학을 갈구했던 이 문인들은 당대의 비참하고도 곤혹스러운 현실과 대결하며 비판 정신을 표출하는 한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우리 문학의 이정표를 세우려고 애썼다.
정한모(1923∼1991)는 시인이자 국문학자, 문화행정가였고 서울대 문리대 교수와 문화공보부 장관을 지냈다. 주요 작품으로 '카오스의 사족', '아가의 방', '현대작가연구' 등이 있으며, 1988년 문공부 장관 재임 중 시인 백석 등 납·월북 작가들의 해금을 주도했다.
올해 문학제의 기획위원장을 맡은 우찬제 서강대 교수는 정한모의 시집 '아가의 방'에 대해 "'아가'라는 시적 메타포를 유념해 살펴보면 새로운 민족 문학,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한모의 시에서 대부분의 시적 상황은 밤입니다. 새벽에 아가가 깨어나고 미소 짓는 그런 풍경을 희구하죠. 어두운 밤의 현실을 넘어 아가가 반짝 미소 짓는 새벽으로 나아가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할 수 있지요."
박용구(1923∼1999)는 계간 '문예'의 편집자를 지낸 소설가로 주요 작품에 '안개는 아직도', '만월대', '진성여왕', '노도' 등이 있다.
시인, 소설가, 서예가, 극작가 등 전방위로 활동했던 한운사(1923∼2009)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한국일보 문화부장을 거쳐 방송문화연구원장, 방송작가협회 이사장 등을 지낸 한운사는 영화 '빨간 마후라'를 비롯해, 소설 '현해탄은 알고 있다' 등을 주요 작품으로 남겼다.
'실향', '낙향 이후' 등을 남긴 시인 한성기(1923∼1984), '문예' 지의 창간동인으로 '봄이 오면', '농민' 등을 남긴 소설가 홍구범, '누나를 찾아서', '소년과 말' 등을 남긴 소설가 방기환(1923∼1993)도 있다.
정한모와 한운사를 제외한 4명은 우리 문학계에서 그리 널리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은 아니다. 한운사 역시 소설이나 시보다는 드라마 작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우찬제 교수는 "그동안은 문학사(史)에서 이미 평가가 완료됐거나 많이 평가가 이뤄진 그런 작가들이 (탄생 100주년 문학제의) 중심이었는데 이번에는 기존의 문학사에서 별로 평가되지 않은 문인들"이라면서 "기존에 평가되지 않은 작가들이 한국 문학사에서 어떻게 새롭게 의미를 얻을지 이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학제는 11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대산홀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으로 시작한다.
우찬제 기획위원장의 총론을 시작으로 이철호·신은경·조영복·송기한·이명원·김정숙 등 평론가들이 참여해 일제강점기와 해방, 분단, 근대화로 이어지는 격변기를 살아낸 이들 문인 6명에 대한 글을 발표한다. 심포지엄은 유튜브 '대산문화재단' 페이지에서 생중계한다.
12일에는 서울 마포중앙도서관 마중홀에서 '문학의 밤' 행사가 열린다.
40세 이하의 젊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선배 문인들의 작품을 낭독하고, 최지인 시인이 뮤지컬 감독 김길려와 손잡고 준비한 짧은 시극도 선보인다.
계간 '대산문화' 여름호에는 '나의 아버지' 코너에 탄생 100년을 맞은 정한모·한성기·한운사의 유족이 쓴 글이 실린다.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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