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전세제도 어찌하오리까 [김상철의 경제 톺아보기]
제2의 전세사기 사태 막으려면 계약 투명성 높여야
(시사저널=김상철 경제 칼럼니스트(전 MBC 논설위원))
전세는 주거 수단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금융상품이기도 하다.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전세보증금이라는 이름으로 2년간 돈을 빌려주고 만기가 되면 돌려받는다. 빌려준 돈에 대한 이자를 받기는 하는데 돈 대신 주거 서비스라는 형태로 받는 것이다. 집주인 입장에서 보면 집을 일정 기간 남에게 내어주는 대신 돈을 빌리는 방법이다. 2년 만기 채권과 같다.
임대차 계약이면서 동시에 사금융의 일종이기도 한 전세제도가 지금처럼 확대된 것은 그만큼 장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세제도는 집주인에게나 세입자에게나 모두 괜찮은 제도였다. 고도 경제성장과 함께 집값은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금처럼 집을 사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쉽게 빌리지 못했다. 전세는 집주인들이 집을 살 때 모자란 목돈을 전세보증금 형태로 임차인으로부터 조달하는 방법이었다. 사실상의 무이자 은행대출인 셈이었고 보증금을 받아 그냥 은행에 넣어둬도 이자가 월세보다 나았다.
임대차 계약이면서 동시에 사금융
세입자로서도 장점이 많았다. 전세는 가진 현금으로 살 수 있는 집보다 나은 집에서 거주하는 방법이었다. 전세보증금으로 묶인 돈도 일종의 강제 저축 역할을 하면서 나중에 내 집을 마련하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국가경제 전체를 생각해도 전세제도는 나쁜 제도가 아니었다. 당장 여유가 없는 사람도 전세를 놓는 방식으로 자금을 마련해 집을 살 수 있었다. 여러 채에 투자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연히 건설회사는 더 많은 집을 지어 팔 수 있었다. 물론 이걸 장점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갭투자를 가능하게 만들어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전세보증금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가계부채이기도 하다.
1987년 이후 우리나라에는 세 번의 전세난이 있었다. 먼저 87년부터 90년까지는 집값이 폭등하면서 전셋값 역시 덩달아 올랐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에는 집값이 폭락하면서 전셋값도 떨어져 세입자들이 집주인들에게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역(逆)전세난'이 일어났다. 집값이 하락하면서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려면 빚을 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으로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를 극복한 후에는 저금리 상황에서 집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많이 바꾸면서 발생한 전세난이 있었다.
전셋값이 급등하거나 전셋집이 부족한 경우에는 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신규 주택 공급을 늘려 전세 수요를 줄이거나 임대주택을 더 많이 지어야 한다. 이번과 같이 집값과 전셋값이 떨어지면서 발생하는 이른바 역전세난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임대인이 거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임차인에게 전가하면서 발생한다. 전세 시장에는 거래 상대방의 위험에 대한 보완 장치가 부족하다. 전세 만기 시점에 보증금을 반환하지 못하는 것은 채무불이행으로 디폴트나 다름없지만, 전세계약에서는 이 경우 임대인이 어떤 식으로 임차인에게 보상할지를 충분히 명시하지 않는다.
정보의 비대칭 현상은 특히 임차인에게 불리하다.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받는 방법으로 상대방, 그러니까 세입자의 위험에 대한 정보 부족을 보완한다. 하지만 반대로 세입자가 집주인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깡통전세가 발생해도 보증금을 돌려줄 수 있는 자금 여력이 있는 사람인지 세입자가 미리 알기는 어렵다. 보통의 경우 부동산 거래에서 이 역할을 해야 하는 건 공인중개사다. 그러나 공인중개사가 아예 잘못된 계약에 가담했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그동안 전세 시장의 위험에 대비해 정부가 한 일은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을 도입한 것 정도다. 그러나 정보 비대칭 문제의 해결 없는 보증보험 제도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수익성 악화와 이에 따른 보험료 인상만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전세보증금 채권 사들이는 방식은 비현실적
정부는 '전세사기 예방 및 피해 지원방안'을 발표하고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선순위 보증금과 체납에 관한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개정안의 주요 내용이다. 정보 비대칭 문제 개선을 위한 방안이지만 정보 수집과 평가에는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이 든다는 문제가 있다. 보증보험을 담당하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임대인의 권리 관계나 세금 체납 여부 등 개인정보를 파악하고 기준에 미달할 경우 계약이 불가능하도록 조사 권한을 강화하는 방안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중개 시장에서 전문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세입자가 집주인이 아니라 보증보험회사에 전세금을 먼저 전달하고 회사가 계약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집주인에게 돈을 주는 방식도 검토할 수 있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전세계약이 합법적인 사적 거래라는 점에 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특정 계약방식을 강제하기는 어렵다. 전세계약은 구조적으로 상환을 담보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부족한, 주택을 매개로 하는 개인 간 금융거래다. 전세제도가 유지되는 한 이른바 깡통전세 문제는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 전세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한마디로 단언하기엔 변수가 너무 많다. 집값이 안정되고 금리가 낮아지면 전세는 점차 월세로 전환될 것이다. 그러나 금리가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면 다시 전세 비중이 높아질 수도 있다. 이번 전세사기 사태를 계기로 정확한 시세 파악이 쉽지 않은 빌라나 오피스텔은 월세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순기능이 적지 않은 전세제도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전세제도 덕분에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주거 선택의 다양성이 높다. 목돈이 있는 사람은 전세를, 목돈은 없지만 수입이 안정적이면 월세를 선택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임대인도 당장 소득이 필요하면 월세로, 전세자금을 융통할 필요가 있으면 전세로 내놓으면 된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목표는 전세계약의 투명성을 높여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면서 다양한 상황에 대비하도록 유도하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보면 전세보증금 채권이나 집을 아예 사들이는 방식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못해 오히려 전셋값은 폭등하고 사기는 악성화할 가능성이 크다. 전세자금 대출의 보증 비율을 높이는 것도 좋은 방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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